우렁터 2013. 1. 12. 16:44

조선시대 회화는 17세기를 경계로 하여 전후 2기로도 나뉘지만, 정확하게는 3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15세기 초엽에서 16세기 중엽까지 화원(畵院)의 화사(畵師)가 중심이 되어 송 ·원의 화풍을 그대로 모방한 시기로, 북송(北宋) 곽희(郭熙)를 모방한 안견(安堅)의 산수화(山水畵)가 대표적이다.

 

중기(16세기 중엽∼17세기 말)로 접어들면 명초(明初)의 원체(院體) ·절파(浙派) 계통의 북종화(北宗畵)가 수입되어 이징(李澄) 등이 활약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중국화 계통이면서 이정(李霆) ·윤두서(尹斗緖) 등에서 한국화의 특색을 가진 화풍이 생겨난다.

 

후기(18∼19세기)는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의 영향이 뚜렷한 시기였으나, 한편으로는 화풍(畵風) ·화제(畵題)에서 조선화(朝鮮化)의 시대이기도 하다. 정선(鄭敾)은 독특한 준법(法)을 써서 금강산 등의 실경(實景)을 묘사한 진경산수(眞景山水)로 유명하며, 김홍도(金弘道)도 같은 경향의 대가였고, 강세황(姜世晃)은 서양화를 포함한 여러 화법을 경험적으로 구사한 불세출의 귀재였다.

 

 

1. 안견(安堅)

 

1447년 몽유도원도를 그린 사실 이외에 출생/사망년도는 알려져있지 않다.

 

1447년(세종 29)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위하여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렸고, 다음해에 《의장도(儀仗圖)》를 그렸다. 신숙주(申叔舟)의 《보한재집(保閑齋集)》에 의하면 안견은 안평대군을 가까이 섬기면서 안평대군이 소장하고 있던 고화(古畵)들을 섭렵함으로써 독특한 화풍을 이루었다. 산수화에 가장 뛰어났으며, 그 밖에 초상(肖像) ·화훼(花卉) ·매죽(梅竹) ·노안(蘆雁) ·누각(樓閣) ·말[馬] ·의장도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2 강희안 [姜希顔, 1417(태종 17) ~ 1464(세조 10)]

 

조선 초기 문신·선비화가. 자는 경우(景愚),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晉州). 희맹(希孟)의 형이다. 1441년(세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과 호조참의(戶曹參議)를 거쳤으며, 55년(세조 1)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시는 당(唐)나라의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 그림은 송(宋)나라의 유송년(劉松年)과 곽희(郭熙), 글씨는 진(晉)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元)나라의 조맹부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특히 그림에 있어서는 명대(明代)의 원체화풍(院體畵風)이나 절파화풍(浙派畵風)을 수용했으며 화풍은 당대의 독보적 존재로 지목되었고 산수와 인물에서도 크게 이름을 떨쳤다.

 

 

3 이정 [李楨, 1578(선조 11) ~ 1607(선조 40)]

 

조선 중기 화가. 자는 공간(公幹), 호는 나와(瀨窩) ·나재(瀨齋) ·나옹(瀨翁) ·설악(雪嶽). 1589년(선조 22) 장안사(長安寺)를 개축할 때 산수와 천왕제체(天王諸體)를 그렸다. 최립(崔笠)으로부터 시문을 배웠으며, 허균(許筠) ·심우영(沈友英) ·이경준(李耕悛) 등과 교유했다. 그림 뿐만 아니라 시와 서예에도 능했고 불교에 심취해 중이 되려고도 했다. 30세에 요절했지만 전하는 작품들은 원숙한 솜씨와 세련된 화격(畵格)을 보여준다. 당시 유행했던 절파화풍, 안견파화풍, 남종화풍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화풍을 구사했다. 작품에 《산수도》 《산수화첩》 등이 있다.

 

 

4 김명국 [金明國, 1600(선조 33) ~ ?(?)]

 

조선 중기 대표적인 절파풍의 화가. 어릴 때 이름은 명국(鳴國). 자는 천여(天汝), 호는 연담(蓮潭) ·취옹(醉翁) ·국담(菊潭). 본관은 안산(安山).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서 교수를 지냈으며, 1636년(인조 14)과 43년 두 차례에 걸쳐 통신사(通信使)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47년 창경궁 저승전의 중수공사 때는 화원 6명과 화승(畵僧) 66명을 데리고 책임화원으로 일했다. 호방한 성격으로 화풍도 굳세고 거친 필치와 흑백대비가 심한 묵법(墨法), 분방하게 가해진 준찰, 날카롭게 각이 진 윤곽선 등이 특징이다. 작품으로 《심산행려도(深山行旅圖)》 《기려인물도(騎驢人物圖)》 《관폭도(觀瀑圖)》 등이 있으며 절파풍의 산수화 이외에도 선종화에 뛰어났다. 《달마도(達磨圖)》를 대표작으로 하는 그의 선종화들은 한두번의 간결한 붓질로 대상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면서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5 윤두서 [ 尹斗緖 , 1668~1715 ]

 

본관 해남, 자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이다. 선도(善道)의 증손, 덕희(德熙)의 아버지이다.

화가로서는 특히 인물화와 말을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한 일반 회화작품은 대체로 조선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한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보인다. 그러나 인물화와 말 그림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하였으며, 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현재 그의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는 자화상 《윤두서상》(국보 240)을 들 수 있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에게 계승되고, 조선 후기의 화가 허유(許維)도 종가에서 그 전통화풍을 익혔다 한다. 유작으로는 60여 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는 《해남윤씨가전고화첩》(보물 481)을 비롯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노승도(老僧圖)》 《출렵도(出獵圖)》 《백마도(白馬圖)》 《우마도권(牛馬圖卷)》 《심산지록도(深山芝鹿圖)》 등이 전한다.

 

 

6 정선 [鄭敾, 1676(숙종 2) ~ 1759(영조 35)]

 

조선 후기 화가.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겸초(兼艸) ·난곡(蘭谷). 본관은 광산(光山).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 위솔(衛率)을 비롯하여 1729년(영조 5) 한성부주부(漢城府主簿), 34년 청하현감(淸河縣監)을 지냈다. 주요작품으로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통천문암도(通川門巖圖)》 《금강전도(金剛全圖)》 《입암도(立巖圖)》 《만폭동도(萬瀑洞圖)》 등이 있다.

 

 

7 강세황 [姜世晃, 1713(숙종 39) ~ 1791(정조 15)]

 

조선 후기 문신·서화가.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 ·산향재(山響齋) ·표암(豹菴). 본관은 진주(晉州). 61세에 처음으로 벼슬에 올라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호조·병조참판을 지냈다. 1784년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에 가서 서화로 이름을 날렸다. 글씨는 왕희지(王羲之) ·미불 ·조맹부 등 중국 역대 명필들의 글씨체를 본받아 해서 ·초서 ·예서 ·전서(楷書·草書·隸書·篆書) 등 각 서체에 모두 뛰어났다. 그림은 산수(山水) ·사군자(四君子) ·화조화(花鳥畵)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다.

진경산수로는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 유명하고 그 중 <영통동구(靈通洞口)>는 미점(米點)을 쓰는 남종화적인 기법에 대담한 필치와 현대 수채화와도 같은 신선한 색채로 바위의 모습을 조화시킨 개성이 강한 그림이다. 작품에 《현정승집(玄亭勝集)》 《첨재화보》 《삼청도(三淸圖)》 《벽오청서도(碧梧淸暑圖)》 《난죽도(蘭竹圖)》 등이 있다. 특히 자서전인 《표옹자지(豹翁自誌)》에 들어 있는 2폭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7, 8폭의 초상화를 남겼다.

 

 

8 김홍도 [金弘道, 1745(영조 21) ~ ?(?)]

 

조선 말기 화가.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취화사(醉畵士) 또는 첩취옹(輒醉翁). 본관은 김해(金海). 도화서화원(圖畵署畵員)으로 산수·도선·인물·풍속·화조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후대에 이름을 크게 떨쳤다. 그는 40살 이전에는 정형산수(定形山水)와 도선인물화를 주로 그렸으며, 40살 이후에는 진경산수(眞景山水)와 풍속화를 다루었다. 금강산을 많이 묘사했던 진경산수의 경우 정선 등의 영향이 얼마간 엿보이지만, 탁월한 공간구성이라든가 강한 묵선(墨線)과 태점(苔點)의 변화있는 구사, 맑고 투명한 화면효과 등은 그의 특색이라 하겠다. 서민들의 생활상과 생업의 이모저모를 간략하면서도 짜임새있는 구도 위에 풍부한 해학적 감정을 곁들여 표현한 풍속화들은 정선이 이룩했던 진경산수화의 전통과 더불어 조선 후기 화단의 새로운 동향을 대표하는 업적이다.

대표작으로 《서원아집육곡병(西園雅集六曲屛)》 《군선도병(群仙圖屛;국보 제139호)》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보물 제527호)》 《금강사군첩(金剛四君帖)》 《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 《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 《단원도(檀園圖)》 《섭우도(涉牛圖)》 《기로세련계도 《단원화첩》 《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가 있다.

 

 

9 신윤복 [申潤福, 1758(영조 34) ~ ?(?)]

 

조선 후기 화가.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본관은 고령(高靈).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산수화에서는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으로 참신한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로 특히 뛰어났다.그가 추구한 풍속화의 세계는 단순한 차원을 뛰어넘는, 회화의식의 개방된 시각으로의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미인도》 시리즈에서는 그의 우미(優美)하고도 감각적인 필촉과 채색이 인상적이며, 극도로 섬세한 세교(細巧)의 필선들이 인물화의 독자적 경지를 개척한 그의 면모를 느끼게 한다. 이 밖에 주요 작품으로 《풍속화첩》에 수록된 《단오도》 《연당(蓮塘)의 여인》 《무무도(巫舞圖)》 《산궁수진(山窮水盡)》 《선유도(船遊圖)》 등이 있다.

 

 

10 장승업 [ 張承業 , 1843~1897 ]

 

본관 태원(太原). 자 경유(景猶). 호 오원(吾園). 화원(畵員)을 지내고 벼슬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고아로 자라 어려서 남의집살이를 하면서 주인 아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화재(畵才)에 뛰어났고 술을 몹시 즐겨 아무 주석(酒席)에 나가서나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다. 절지(折枝)·기완(器玩)·산수·인물 등을 잘 그렸고 필치가 호방하고 대담하면서도 소탈한 맛이 풍겨 안견(安堅) ·김홍도(金弘道)와 함께 조선시대의 3대 거장으로 일컬어진다. 주요 작품에 《홍백매십정병(紅白梅十幀屛)》 《군마도(群馬圖)》 《청록산수도(靑綠山水圖)》 《수상서금도(樹上棲禽圖)》 《영모절지병풍(翎毛折枝屛風)》 《풍림산수도(楓林山水圖)》 《화조곡병(花鳥曲屛)》 《담채산수(淡彩山水)》 《화조수도(花鳥獸圖)》 《포대도(包袋圖)》 《심양송객도(陽送客圖)》 《어옹도(漁翁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