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터 2013. 1. 27. 14:34

2) 바로크 음악

 

3. 파헬벨[Johann Pachelbel](1653.9.1-1706.3.3)

 

1653. 9. 1 뉘른베르크에서 세례받음~1706. 3. 3 뉘른베르크.

 

독일의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

 

오르간 작품으로 유명하며 J.S.바흐 이전의 위대한 오르간 연주자 중의 한 사람이다. 파헬벨은 알트도르프와 레겐스부르크에서 오르간을 배웠으며 빈, 슈투트가르트, 그밖의 다른 도시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있었다. 1695년 뉘른베르크에 있는 장크트제발두스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어 죽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오르간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의 제자 중에는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파헬벨에게 배운 것을 다시 동생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 가르쳤는데 이것이 그의 공식적인 최초의 건반악기 교습이었다. 파헬벨의 모든 작품들은 단순한 대위법 양식으로 씌어졌다. 그의 오르간 작품들은 J.J.프로베르거를 거쳐 프레스코발디에 이르는 이탈리아 음악형식들을 그가 이미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그의 코랄 프렐류드인데, 이것은 보다 서정적인 음악이 주류를 이루는 가톨릭계 남부 독일의 분위기 속에서 프로테스탄트인 북부 독일의 코랄 선율이 자리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널리 알려진 〈카논 D장조〉는 원래 3개의 바이올린과 계속저음(Continuo)을 위해 작곡된 곡인데 같은 조로 된 지그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아들 빌헬름 히로니모우스 파헬벨 역시 오르간 연주자이며 작곡가였다

 

 

4. 알비노니[Tomaso Giovanni Albinoni](1671-1750)

   

1671. 6. 8/14 베네치아~1750/51. 1. 17 베네치아.

 

이탈리아의 작곡가.

 

알비노니-현악과 오르간을 위한 아다지오 G단조

오페라와 기악곡들로 폭넓은 인기를 누렸으며 세련되고 매혹적인 악풍이 독특하다. 부유한 종이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재산을 가졌다. 충분히 훈련받은 음악가로 만토바 공작의 궁정음악가라는 직업 음악가의 위치에 있었으나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다. 50편이 넘는 오페라가 1694~1740년 주로 베네치아에서 공연된 것을 제외한다면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밖에 특히 유명한 작품으로는 〈Sinfonie e Concerti a 5〉(1707)와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협주곡, 1대의 바이올린과 2대의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 등이 있다.

 

 

5. 비발디 [Antonio Vivaldi, 1678.3.4~1741.7.28]

 

요약

이탈리아의 작곡가·바이올린 연주자. 40여 곡의 오페라를 비롯해 많은 종교적 성악곡, 가곡 등을 남겼는데 기악곡은 음악사에서 특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 협주곡 분야에서도 코렐리 등이 만든 형식을 발전시켜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로의 세 악장형식의 독주협주곡과 합주협주곡을 작곡,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국적 이탈리아

출생지 이탈리아 베네치아

주요작품 《조화의 영감》 《사계》

 

본문

베네치아 출생. 어려서부터 산마르코대성당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과 작곡의 기초를 배웠다.

 

1693년 수도사가 되고, 10년 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703∼1740년에는 베네치아 구빈원(救貧院) 부속 여자음악학교에 바이올린 교사로 근무하며 합주장·합창장을 역임하였는데, 그 동안 학생들을 위하여 작품을 많이 만들어 학교 관현악단에서 발표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였다.

 

또 한때는 만토바의 필립공의 악장으로 있었으며, 1716∼1722년에는 마르첼로와 알비노니의 영향을 받아 오페라 작곡에도 주력하였다. 그후 여러 차례 로마·피렌체·빈 등지를 연주여행하였으며, 또 국외에서도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가졌다.

 

그는 40여 곡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많은 종교적 성악곡, 가곡 등을 남겼는데 기악곡은 음악사에서 특히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협주곡 분야에서도 코렐리 등이 만든 형식을 발전시켜 갖가지 현악기와 관악기를 위한 독주협주곡과 합주협주곡을 작곡,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것은 대부분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로의 세 악장형식이며, 알레그로악장에서는 으뜸조[主調]―딸림조[屬調]―관계조―으뜸조라는 전형적인 조구성(調構成)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이 다음 세대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으며, J.S.바흐는 비발디의 작품을 여러 곡 편곡하여 그 기법을 익혔다.

 

주요작품에는 신포니아 23곡, 합주협주곡 《조화의 영감(靈感)》,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사계》, 갖가지 독주악기를 위한 협주곡 다수와 실내소나타 12곡, 바이올린소나타 17곡 등이 있다.

 

6. 마르첼로 [Alessandro Marcello, 1684~1750]

 

요약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마의 문학운동 단체인 델라 아카르디아의 회원이었고, 현에 다양한 관악기를 접목시킨 작품을 작곡했다. 작품으로는 오보에 협주곡 D단조가 유명하다.

 

국적 이탈리아

출생지 이탈리아 베네치아

주요작품 오보에 협주곡 D단조

 

본문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작곡뿐 아니라 계몽적 사상의 소유자로서 수학과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로마의 문학운동 단체인 아카데미아 델라 아르카디아(Academia del la Arcadía)의 회원이었으며 칸타타와 소나타 등 현에 다양한 관악기를 결합시킨 작품을 작곡했는데, 《5성의 콘체르토》(1716)를 포함한 협주곡집이 현재 전한다. 가장 유명한 작품 오보에 협주곡 D단조는 요한 S.바흐(Johann S.Bach)가 쳄발로용으로 편곡하고 악보도 필사하였다.

 

그의 동생 베네데토 마르첼로(Benedetto Marcello:1686∼1739)도 작곡가였으며, 《당세극장 Il Teatra alla moda》(1720) 등을 펴낸 저술가이기도 했다. 때때로 그의 작품이 동생의 작품으로 오해되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에테리코 스틴팔리코(Eterico Stinfalico)라는 이름으로 몇 작품을 출판하기도 했다.

 

 

 

7. 헨델 [1685.2.23~1759.4.19]

 

요약

독일 출생의 영국 작곡가.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했다.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였으며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 《메시아 Messiah》,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등을 작곡하였다.

 

원어명 Georg Friedrich Händel

국적 영국

출생지 독일 할레

주요작품 《메시아 Messiah》《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1736)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본문

할레에서 출생했다. 9세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차하우에게 사사하여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하였다. 그 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였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20세 때 오페라 《알미라 Almira》(1705)를 작곡하여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오페라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가 로마에서 A.코렐리, A.스카를라티의 영향하에 실내악을 작곡하는 한편 피렌체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1710년 하노버궁정의 악장(樂長)으로 초빙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방문한 런던에 매료되어 1712년 이후는 런던을 중심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작곡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171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작곡, 상연하고 1718∼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Chandos Anthoms》 11곡을 작곡하였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하여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오늘날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Radamisto》《오토네 Ottone》《줄리어스 시저 Giulio Cesar》《타메를라노 Tamerlano》《로델린다 Rodelinda》《아드메토 Admeto》《톨로메오 Tolomeo》 등을 작곡하였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 Esther》를 작곡하였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운세가 점차 기울어갔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 ·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28년 대사(臺辭)에다 민요선율을 곁들여 당시의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C.페푸시 작곡의 《거지 오페라 The Begger’s Opera》가 상연되어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부득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에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또다른 오페라 회사인 귀족오페라에 밀려 두 번째 극장을 폐쇄하게 되었다.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악화와 경제파탄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경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예찬되고 있는 《메시아 Messiah》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1732년의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四旬節)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약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하여 점차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을 작곡하고 1738∼1751년까지도 거의 모두를 오라토리오의 작곡에 경주하였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1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하였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의 정수(精髓)를 순수하고도 감동 깊게 전해 주는 명작이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인 작품에 속한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 ·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그것을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하였다. 이런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앞서 언급한 《이집트의 이스라엘인》과 함께 1746년의 작품 《마카베의 유다 Juda Macabaeus》 등이다.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Samson》《벨샤자르 Belshazzar》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였으며, 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실명한 후에도 오라토리오의 상연을 지휘하는 한편 조수의 도움으로 구작(舊作)의 개정에 힘썼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하였지만 기악방면에서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모음곡 《수상의 음악 Water Music》《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Royal Fireworks Music》 외에, 작품 6의 합주협주곡, 작품 4 ·7의 오르간협주곡, 작품 2 ·5의 트리오소나타, 작품 3의 오보에협주곡, 그리고 1720년에 출판된 하프시코드용의 모음곡 등은 모두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종교곡으로는 앞서 말한 11곡의 《찬도스 앤섬》 외에도 유명한 작품으로 위트레히트와 데팅겐의 전승(戰勝)을 축하한 《테 데움 Te Deum》 등이 있다. 1726년에 영국에 귀화하였고 사후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매장되었다.

 

 

8.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3.21~1750.7.28]

 

요약

국적 독일

출생지 독일 튀링겐주 아이제나흐

주요작품 《브란덴부르크협주곡》 《음악의 헌정》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프랑스모음곡》

 

본문

독일의 오르가니스트·작곡가. 1685년 3월 21일 독일 튀링겐주(州) 아이제나흐에서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거리의 악사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바이올린과 오르간을 익혔다. 궁정악단에서 연주와 지휘를 하고, 교회음악가로 활동하면서 바로크음악의 대표적인 곡들을 많이 남겼다.

 

바흐의 가계

 

요약

바흐의 가문은 200여 년에 걸쳐 50명의 작곡가를 배출했다. 바흐의 증조부인 요하네스의 세 아들인 요한, 크리스토프, 하인리히 모두 작곡가였다. 바흐에게는 2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 차남 카를 필립 엠마누엘,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등 3명은 음악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본문

17세기 후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를 탄생시킨 바흐의 가문은 200여 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하였다. 중부 독일 튀링겐주에 있는 빵집 주인으로 치터(Zither:발현악기)의 애호가였다는 파이트(1619년 사망)가 바흐 가문의 옛 조상이라 하며, 파이트의 장남 요하네스(1580?~1626)가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증조부가 된다.

 

유명한 거리의 악사였던 요하네스의 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하인리히는 모두 작곡가였으며 수편의 작품이 남아 있다. 요한 세바스찬의 조부는 그중 차남인 크리스토프(1613~1661)이며,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다.

 

장남 게오르그 크리스토프는 바흐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교회합창단장인 칸토르의 지위에 올랐으며, 쌍둥이 동생 요한 크리스토프와 요한 암브로지우스(1645~1695)는 거리의 악사가 되었다. 그리고 암브로지우스의 막내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大바흐)이다.

 

그에게는 20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장남인 빌헬름 프리데만(1710~1784), 차남 카를 필립 에마누엘(1714~1788),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1735~1782)의 3명은 음악사에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에마누엘과 크리스티안은 전자가 '함부르크의 바흐', '베를린의 바흐', 후자가 '밀라노의 바흐', '런던의 바흐'로 일컬어질 정도로 전 유럽에서 활약하고 대바흐와 헨델을 정점으로 하는 바로크음악에서 하이든·모차르트의 빈고전파로 음악사를 크게 전환시켰다.

 

바흐의 생애

 

요약

독일의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아이제나흐에서 요한 암브로지우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북독일의 뤼네브르크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다니다 졸업 후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 아른슈타르의 교회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후 괴텐궁정음악단을 이끌었고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했다.

 

본문

요한 세바스찬은 중부 독일에 있는 루터파 신앙의 중심지인 아이제나흐에서 거리의 악사인 요한 암브로지우스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당숙 요한 크리스토프의 오르간 연주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10세 때 양친을 여의고,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살면서 독일 오르간음악의 전통을 익히게 되었다. 큰형의 가족수가 늘어나자 자립을 해야 했던 바흐는 1700년 봄 북독일의 뤼네부르크로 가서 그 곳 고등학교 급비학생이 되어 루터파의 교육을 받으면서 교회의 합창단원으로서 북독일악파의 다양한 종교음악과 친숙하게 되었다.

 

170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듬해 바이마르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주자로 근무하면서 연주경험을 쌓았고, 3개월 후에는 아른슈타트의 교회 오르간 주자로 채용되었다. 오르간 주자는 오랫동안 희망하였던 자리였으므로 성능 좋은 오르간이 설치된 새 직장에서 오르간 연주법과 작곡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성가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과거와 당시의 대가들의 작품을 필사·연구하여 점차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유명한 라단조의 《토카타와 푸가》, 그리고 《여행을 떠나는 사랑하는 형에게 붙이는 카프리치오》 등이 이 시기에 쓴 작품들이다.

 

1707년 6월 바흐는 아른슈타트에서 같은 중부 독일의 뮐하우젠으로 옮겨, 성브라지우스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여기서도 그는 전과 같이 열심히 작곡하면서 교회 칸타타에도 손을 댔으며,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해 가을에 그는 사촌인 마리아 바르바라와 결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그 후 13년 동안에 7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그 중 빌헬름 프리데만과 카를 필립 에마누엘은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결혼한 이듬해 바흐는 다시 바이마르로 돌아가,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가 되었다. 약 10년간의 바이마르 시절에 그는 오르간 주자로서 명성이 높아지고 작품도 점차 원숙해져 대가로서의 풍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은 《전주곡과 푸가》, 《토카타》 그리고 《코랄전주곡》과 같은 오르간작품이었으며, 따라서 이 시기를 '오르간곡의 시대'라고도 부른다.

 

한편 그는 교회 칸타타를 거의 매달 한 곡씩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궁정악단의 연주를 통해 비발디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악파의 음악을 알게 되었다. 바흐는 이탈리아의 협주양식이라는 새로운 작곡법에도 착안, 비발디의 협주곡을 오르간이나 쳄발로로 편곡하였다. 이것이 훗날 협주곡의 명작을 낳는 기초가 되었다. 17년 말, 그때까지 궁정의 집안싸움에 휘말리기도 하고, 또 희망하고 있던 궁정악장의 지위도 얻지 못하자, 바흐는 바이마르궁정악단을 떠나 괴텐으로 이사하였다.

 

괴텐궁정악단의 지위는 새바람을 찾고 있던 바흐에게 가장 조건이 좋은 것이었으며, 그는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17인으로 구성된 궁정악단을 이끌어 가면서 자유롭게 작곡과 연주에 열중하였다. 좋은 환경과 풍족한 생활 속에서 창작에 대한 의욕이 높아진 그는 잇달아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기악곡, 3개의 《바이올린협주곡》, 6곡의 《브란덴부르크협주곡》, 무반주 바이올린의 소나타와 파르티타, 무반주 첼로를 위한 모음곡 등은 이 시기에 작곡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밝은 빛으로 충만되어 있는데, 이것은 바흐의 사회적·가정적인 행복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1720년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죽자, 이듬해 35세의 바흐는 안나 막달레나를 새로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하여 《막달레나를 위한 클라비어곡집》(《프랑스모음곡》도 포함)을, 그리고 장남 프리데만을 위하여 《인벤션》을 작곡하였으며,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도 이 시기에 정리된 것이다.

 

1723년 바흐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의 칸토르에 취임하여 죽을 때까지 27년간을 교회음악가로 보내게 된다. 그의 임무는 기악과 성악의 개인지도와 합창단의 훈련, 그리고 이 도시의 교회음악을 작곡하는 일이었다.

 

성토마스교회와 성니콜라이교회에서는 일요일마다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금요일에는 수난곡이 불려졌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의 하나님은 견고한 성이로다》 등을 포함한 140곡 이상의 교회칸타타, 《마태오수난곡》을 포함한 몇 곡의 수난곡, 《마니피카트》,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나단조미사》 등 많은 교회음악이 작곡되었다. 이 라이프치히시기를 '교회음악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면에서는 옳지만, 사실상 그는 이 때 대학생의 연주단체를 위해 많은 세속적인 칸타타와 클라비어협주곡도 작곡하였고, 만년에는 대위법작법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골트베르크변주곡》, 《음악의 헌정》, 《푸가의 기법》 등도 작곡하였다.

 

그러나 이 최후의 《푸가의 기법》은 급속히 쇠약해진 시력과 뇌졸중의 발작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결국 실명한 그는 7월 28일 그동안 복용해 온 약의 해독으로 급격한 전신 허약증세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으며, 성요한교회의 묘지에 묻혔다.

 

바흐의 작품

 

요약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대위법, 이탈리아의 협주양식과 화성, 프랑스 음악의 섬세한 건반작업과 프랑스식 서곡 등이 바흐의 개성으로 융화되어 긴장도 높은 독특한 음악으로 표현되었다.

 

본문

바흐는 대략 17세기 초엽에서 시작되는 바로크음악의 총괄자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독일의 전통적인 대위법 예술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북독일의 북스테후데와 남독일의 파헬벨의 오르간 음악의 작법을 배웠다. 다음에 코렐리와 비발디로부터 이탈리아음악의 명쾌한 협주양식과 풍부한 화성, 그리고 라틴적인 형식감을 도입하였으며, 륄리와 쿠프랭에게서 프랑스 음악의 섬세한 건반작법과 대담한 프랑스식 서곡을 배웠다.

 

당시에 풍미하던 음악의 전통과 각 국민의 양식이 바흐의 천재적인 개성 속에서 융화되어 긴장도가 높은 독특한 음악을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흐를 전통적인 보수주의자, 여러 양식의 총괄자로서만 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겠다.

 

그의 작풍에는 베토벤이 낭만파를 예견하고, 바그너가 20세기의 음악을 예견한 것과 같이, 훗날 발생한 고전파의 양식을 암시하는 많은 특성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9. 마르첼로 (Benedetto Marcello 1686∼1739)

 

이탈리아 작곡가·시인. 베네치아 출생. 로티와 가스파리니에게 사사했다. 한편 법률을 배워 정부의 중요한 지위에도 있었다. 그는 1724∼1726년 시편의 첫 50편을 지우스티니아니가 이탈리아어로 번역한 가사로 성악과 기악곡 《시와 음악의 영감(Estro poeticoarmonico)》을 작곡하였다. 이 곡들은 1∼4성부로 대개 화려한 레치타티보적 양식으로 쓰여졌으며, 오르간 또는 클라비쳄발로의 바소 콘티누오를 갖고 있다. 그 밖에 오페라·오라토리오·마드리갈·콘체르토그로소·트리오 소나타 등을 작곡했고, 또 오페라의 대본이나 당시의 오페라에 대한 풍자적 비평문인 《유행극장(1720)》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