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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국 고전 인물 열전

우렁터 2013. 1. 27. 15:37

2. 중국 고전 인물열전

(13)진시황(秦始皇) 외적 막으려 만리장성 쌓았지만…아들 胡亥가 나라를 망쳤다

한국경제 원문 기사전송 2010-08-07 09:16

 

베이징에서 북쪽으로 40㎞ 올라가면 거대한 만리장성이 구불구불 산등성이를 타고 펼쳐진다. 입구에 크게 쓰인 한자와 한글 글씨는 이곳을 찾는 상당수의 관광객이 한국인임을 보여주는 단서다. 13억 중국인들은 죽은 진시황이 산 중국인을 먹여 살린다고 믿고 있다. 하루에도 수천 대씩 돌아다니는 관광버스가 이를 입증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진시황은 무자비한 정복욕으로 죄 없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폭군이며,분서갱유를 단행한 문화말살자다. 또 신선에 빠지고 불로초에 눈이 팔려 어린 남녀 수천명을 배에 태워 무작정 바다로 보낸 황당무계한 자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이런 반론도 있다. 불분명한 출신 성분을 딛고 척박한 서쪽 진나라를 떨치고 일어나 천하를 통일하고,병합한 6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하기 위해 도량형과 화폐,문자를 통일했으며,통치 근간이던 봉건제를 군현제로 바꾼 혁신적인 인물이란 것이다.

 

《사기》'진시황본기'는 진나라가 집정한 40여년의 역정을 사실대로 그려내고 있다. 사마천은 첫머리에서 아버지 장양왕이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을 때 여불위의 첩을 취해 낳았다고 적고 있고,《사기》'여불위열전'에는 한층 더 나아가 그 첩이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장양왕이 그것을 모르고 자기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고 보충했다.

 

13세에 아버지의 뒤를 이은 진시황은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아채게 되고,그토록 의지했던 여불위가 지나치게 강성해진 데다 모반에 연루되자 그를 가차 없이 제거하고 집정 26년 만인 39세에 천하를 손에 넣게 된다. 두 번의 결정적인 암살 위험을 견뎌낸 그는 자신을 황제라고 이름 짓고,농업을 숭상하고 상업을 억제하며,모든 것은 법에 따라 엄정히 처리했다. 이름에 걸맞게 그는 통일제국을 거미줄처럼 잇는 도로를 동(銅)마차를 타고 누비며 자신의 업적을 금석에 새겨 기념하기도 했다.

 

6년 후 진시황은 북방을 다스리고 오는 길에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친 귀신이야기 책 《녹도서(錄圖書)》를 얻게 됐다. 거기에는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란 섬뜩한 말이 있었다. 진시황은 즉시 장군 몽염(蒙恬)에게 군사 30만명을 이끌고 북방의 호인(胡人)들을 치도록 하고,20여만명의 죄수를 동원해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그러고는 2년 후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제나라 박사 순우월(淳于越)의 전통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의약,점술,식목 관련 서적을 제외한 모든 책을 없애고 철저히 법으로 다스릴 것을 천명한다. 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1만명이 앉을 수 있는 아방궁도 짓는다. 물론 여기에도 70여만명의 죄수가 동원됐다고 사마천은 '진시황본기'에서 적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영지(靈芝) 및 선약(仙藥)과 신선을 찾게 하고 자신도 짐(朕)이란 말 대신 신선을 의미하는 진인(眞人)으로 부르라고 명했다. 수도 함양의 궁전 270곳을 연결해 휘장을 두르고 악기와 여인들을 가득 채웠다. 자신의 거처를 입에 올리면 사형에 처했다.

 

그런 그가 나이 50세에 동방 순행에 나섰다가 사구(沙丘)라는 곳에서 객사하고 만다. 죽기 전에 그가 맏아들 부소에게 제위를 계승하라고 남긴 유서는 이미 밀봉된 채로 환관 조고의 손에 있었다. 여름에 썩어가는 그의 시신 곁에는 총애하던 막내 아들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환관 대여섯명이 있을 뿐 맏아들 부소는 변방에 쫓겨나 있었다. 결국 그의 유서는 부소를 제외한 이들에게 위조돼 부소와 몽염은 자결하라는 거짓 유서로 바뀌었고 이로써 진제국은 호해에게 넘어가게 된다.

 

21세에 제위에 오른 호해는 갖은 폭정을 일삼다가 반란군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하고 말았다. 뒤를 이은 자영도 46일 만에 유방에게 투항했다. 결국 진나라를 멸망하게 만든 자는 호인이 아닌 아들 호해였으니 그토록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건설한 만리장성은 오히려 진나라와 북방의 소통을 방해하고 화이(華夷)로 대변되는 충돌과 단절,반목과 질시의 상징이 돼버렸다.

 

최고경영자의 섣부른 판단착오와 자기 과신은 구성원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심지어 조직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 판단은 리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늘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

 

(12) 진섭(陳涉)‥머슴에서 왕으로…사람을 믿지 못해 6개월만에 망하다

한국경제 원문 기사전송 2010-07-31 11:00

 

 

 

중국의 제후 왕 가운데 후손을 두지 못한 자가 있다. 바로 진섭이다. 그를 위해 고조 유방은 그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두게 하고 틈이 나면 제사도 지내 주는 등 자신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진섭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이뿐이랴. 사마천도 반란을 통해 왕이 된 진섭을 제후 왕의 영역인 '세가'에 편입,역사관의 객관성과 서술의 편파성 문제에 대한 오해와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진섭세가》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진승(陳勝)이며, 양성(陽城) 사람이고, 자(字)는 섭(涉)이다. 진섭이 젊었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밭갈이하는 머슴살이를 한 적이 있는데,밭갈이를 멈추고 밭두렁에서 쉬며 자신의 신분을 한참 동안 한탄하다 다른 머슴들에게 말했다. "부귀하게 된다면 서로 잊지 말기로 하지." 그러자 머슴들은 비웃으면서 "너는 고용 당해 밭갈이를 하는데 무슨 부귀란 말인가?"라고 놀렸다.

 

이 말을 들은 진섭은 "아! 제비와 참새가 어찌 큰 기러기와 고니의 뜻을 알리오!"라고 한탄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는 결국 진시황의 뒤를 이은 진 2세가 정권을 잡으면서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켜 초나라를 넓힌다는 뜻의 장초(張楚)를 국호로 삼아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진섭이 왕이 되고 난 뒤 어느 날, 그와 함께 머슴일을 하던 옛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가 막무가내로 궁궐 문을 두드리며 "나는 진섭을 만나려 한다"고 말하자 영문을 모르는 궁궐 문지기가 그를 포박하려고 했다. 그가 여러 차례 자신이 진섭의 친구라고 해명하자 풀어주고 보고는 하지 않았다. 진섭이 호화스런 행차를 하며 궁문을 나섰을 때 그가 길을 막고 큰 소리로 진섭의 이름을 불러댔다.

 

진섭은 반가운 마음에 그와 함께 수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오게 됐다. 궁궐 문에 들어서는데 궁전에 드리운 휘장을 보자 그 친구가 "대단히 화려하구나! 진섭이 왕이 되니 궁전이 높고 깊구나!"고 말하면서 방자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떠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옛날 날품팔이 시절의 일도 떠들어댔다. 그 친구는 이미 왕이 되어 주위에 신하들이 진섭과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진섭은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떠들어대는 친구가 내심 야속했다. 자신은 이미 왕이 됐는데 그 친구는 옛날로 돌아가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최측근들이 진왕에게 다가와 "친구 분이 우매하고 무식하며,멋대로 망언을 일삼으니 왕의 위엄을 깎아내리게 됩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진섭은 자신의 과거가 친구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지게 되면 위엄을 세우기도 어렵다고 판단해 그 친구의 목을 베어 버렸다.

 

이런 소문은 빨리 퍼져나가게 마련이다. 진섭의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 외로움에 빠진 진섭은 판단력이 흐려지게 됐고,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진섭은 주방(朱房)을 중정관(中正官)으로 삼아 인사를 관장하게 했고,호무(胡武)를 신하들의 과실을 감찰하는 사과관(司過官)으로 삼아 감시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적을 공략하고 돌아와 복명(復命)할 때 주방과 호무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붙잡아 죄를 묻기도 하고,가혹하게 감찰하면서 진섭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이 두 사람과 좋지 않은 사이거나 아래에서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자료를 주지 않으면 모두 이들이 엄히 다스렸다. 진섭은 이 두 사람만 신임했다. 여러 장수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왕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으며, 저마다 불평과 불만을 마음 속에 담아두게 됐다. 6개월 뒤에는 진섭이 봉하고 파견한 자들이 결국 모반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망하고 말았다.

 

권력자라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 속에 이미 움터 있을 오만의 싹이다.

 

(11) 장량(張良)‥난세에 겸허·배려로 천하경영 도운 '유방의 그림자'

한국경제 원문 기사전송 2010-07-28 18:32

 

권모술수가 판치는 천하쟁패의 소용돌이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면서도 확고한 위상을 구축한 인물은 매우 드문데,그중 장량과 소하가 있다. 우리에겐 장자방(張子方)으로 더 알려진 장량처럼 신비스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도 없을 것이다. 사마천이 장량을 말하면서 야전에 나서지 않고 군영의 장막에서 꾀로 승리를 도맡아 했다고 평가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모든 전략은 천하쟁패에 승패를 가름할 만한 것이었다.

 

《사기》의 <유후세가(留侯世家)>에 의하면 곱상한 외모에 잔병치레를 많이 한 장량은 한(韓)나라 사람이다. 조부 개지(開地)는 한나라의 소후(昭侯),선혜왕(宣惠王),양애왕(襄哀王)의 상국을 지냈고,아버지 장평(張平)은 희왕(釐王)과 도혜왕(悼惠王)의 상국을 지냈다.

 

진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할 당시 그의 집에는 노복(奴僕)이 300명이나 되었는데,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도 치르지 않고 모든 가산을 털어 진시황을 죽일 자객을 구해 한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했을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장량은 또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철퇴를 만들어 동쪽을 순시하는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쳐 죽이려 했으나 실패해 성과 이름을 바꾸고 은둔했다.

 

그가 병법을 터득해 모사의 길에 들어선 계기는 다소 황당하다. <유후세가>에 의하면 이렇다. 그가 은둔하던 중 어느 다리 위를 지나는데 한 노인이 자기 신발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주워오라고 해 가져다 주니,신겨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수 없이 신겨 주니 노인이 "젊은이가 가르칠 만하군,닷새 뒤 새벽에 나와 여기서 만나지"라는 뜬금없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닷새 뒤에 약속 장소로 나가보니 이미 노인이 나와 있었다. 다시 닷새 뒤에 만나자고 하여 좀 더 일찍 갔으나 여전히 노인이 먼저 와 있었다. 다시 닷새 뒤에는 아주 한밤중에 가 기다리니 얼마 후 노인이 오더니 "마땅히 이렇게 해야지"하면서 《태공병법(太公兵法)》이란 책을 내놓았다. 노인은 "이 책을 읽으면 왕 노릇하려는 자의 스승이 되고,10년 후에 그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결국 장량은 노인의 말대로 유방이 가장 신뢰하는 모사가 됐다. 겸허함과 배려가 인물의 성장에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는 명장면이다.

 

그는 은둔하는 동안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과 함께 지내기도 하다가 결국 하늘에서 재능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한 유방을 주군으로 섬기기로 하고 그의 핵심 모사가 된다. 장량의 조언에 대한 유방의 신뢰는 절대적이어서 천하를 통일했을 때 소하와 함께 3만호의 식읍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1만호만 받고 유후(留侯)란 작위를 받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천하통일 후 유방이 1년 동안이나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저마다 공이 있다고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줄 식읍은 정해져 있고 공신들은 많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불안한 유방이 장량에게 해결책을 묻자,고조 유방과 사이가 가장 좋지 않은 자를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고조가 옹치(雍齒)란 자를 지목하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자라고 말하니 장량은 대뜸 그를 최우선적으로 봉하라고 조언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고조가 옹치를 위해 친히 술자리를 마련하고 십방후(什方侯)로 봉하고,급히 승상과 어사(御史)를 재촉해 그의 공을 정하고 봉상을 진행하니 불만을 토로하던 신하들은 "옹치가 오히려 후(侯)가 되었으니 우리들도 근심할 게 없다"(<유후세가>)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나머지 공신들은 논공행상에서 제외됐다.

 

이렇듯 약소국 출신임에도 장량이 중용된 것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빼어난 지략을 갖고 그것을 최고 권력자에게 신중하게 조언해 천하경영을 해 나가도록 하는 그림자형 조언자이기에 가능했다. 말년에 태자 책봉 문제로 유방과 틈이 벌어지자,세치 혀에 의지해 그만한 지위에 오른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면서 과감히 모든 것을 내던졌다. 오곡을 먹지 않고 양생술을 배우며 은둔의 길을 택하다가 삶을 마감한 그가 아들에게 후의 작위를 대신하게 만든 것은 오늘날 참모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기에 충분하다.

 

(4) 상앙(商央)‥급진적 개혁으로 이룬 절대권력, 오만과 독선에 무너지고…

한국경제 | 입력 2010.06.04 18:30

 

전체주의적 발상은 모든 구성원이 리더의 요구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단 한명의 반대파도 없어야 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카리스마형 리더는 자신의 심리적 쾌감을 위해 수많은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조직원들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와 공포를 남기기도 한다. 상앙(商 )은 위(衛)나라 왕의 첩이 낳은 아들로,원래 성씨는 공손(公孫)이다. 젊은 시절 그는 위(魏)나라 재상 공숙좌(公叔座)를 잘 섬겨 대부의 집안일을 맡아보는 중서자(中庶子)란 자리에 오르게 된다. 공숙좌는 그의 인물됨을 알고 후임 자리로 점찍어 두었다.

   

어느 날 병에 걸린 공숙좌는 위문 온 위나라 혜왕(惠王)에게 자신을 대신해 나라의 큰일을 맡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혜왕이 귀담아 듣지 않자 만일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죽여 다른 나라로 가지 못하게 만들라는 섬뜩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는 다시 상앙을 불러 똑같은 말을 전한다. 혜왕이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면 위험하니 멀리 떠나가라고.이 때 상앙은 자신을 등용하지 않았는데 어찌 제거하겠느냐며 유유히 자신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던 중 상앙은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진나라 효공(孝公)의 포고령을 보고 진나라에 가 어느 태감(太監)의 빈객으로 있으면서 효공을 네 번이나 만나게 된다. 두 번째 유세까지는 덕치를 얘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해 상대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세 번째를 거쳐 마지막 유세에서는 효공이 상앙과 무릎이 닿는 것도 모를 정도로 혼이 쏙 빠져 그가 제시하는 변법의 천하쟁패론을 경청하게 된다.

 

그가 추진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이런 것이다. 군주의 절대권력 확립을 전제로 하면서 귀족의 세습적 특권을 박탈하고,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사상논의를 엄격히 금하는 강압과 전제주의적 통치술이었다. 결국 이런 방대한 사업을 구체적으로 추진,수도를 함양으로 옮기게 된다. 행정구역을 현단위로 개편하고 농업을 중흥시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으며,개간사업을 진행하고 조세도 철저히 징수했다. 특히 군공(軍功)을 세우면 예우하되 사사로운 다툼은 법으로 금했고, 연좌제를 실시해 서로를 감시하게 했다.

 

법을 시행하던 첫 해부터 항의하러 온 자들이 1000여명이나 될 정도로 반대파들이 많았으니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효공의 부담도 컸다. 상앙은 이를 두고 효공에게 "의심스러워하면서 행동하면 공명이 따르지 않고,의심스러워하면서 사업을 하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자는 원래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며,남들이 모르는 지혜를 가진 자는 사람들에게 오만하다는 비판을 듣게 마련입니다"라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여론보다 자기 확신과 결단력에 의지한 리더를 요구했던 상앙은 강력한 법치를 내세운 전제주의적 리더의 전형이자 급진적 개혁가의 모습이다. 상앙의 저돌적인 개혁의지가 없었다면 진나라는 대국의 통치기반을 갖추고 대외 영토 확장 계획을 쉽게 수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앙의 말은 틀림이 없으나 뜻대로만 굴러가지 않는 것이 세상이치다. 모든 일이 예외 없이 착착 진행되어 가던 상황은 효공이 죽으면서 평소 불만을 참아두었던 사방의 정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형국으로 변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상앙은 위나라로 망명하기 위해 국경 근처 객사에 들렀다가 주인장이 요구한 신분증을 내놓지 못해 곧바로 신고되고 만다.

 

그는 결국 "아!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수레에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해 죽게 된다. 이렇듯 상앙은 타인에 대한 지나친 엄격함 때문에 죽음이라는 부메랑을 맞은 비극적 인물이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의 말로가 비참한 것은 대부분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착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8) 주유(周瑜)손권의 오른팔, 유비 물리치고 '천하 三分' 깨려했지만…

한국경제 | 입력 2010.07.02 18:31 | 수정 2010.07.03 10:35

 

소설 《삼국지》의 명장면인 적벽대전은 거의 1권 분량으로 그려질 만큼 흥미진진하다.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근 개봉된 어우위썬(오우삼)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2'에서는 분명 제갈량보다 주유가 주인공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체적인 스토리 전개가 소설보다는 정사에 입각한 설정으로 요약된다. 물론 적당한 소설적 요소도 가미돼 있어 제대로 된 전쟁 영화임을 보여주고 있다.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주유는 건장하고 용모가 빼어난 미남형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도 정통했다. 그는 자가 공근(公瑾)이며 여강(廬江) 사람이다. 종조부(從祖父)인 주경(周景)과 주경의 아들 주충(周忠)은 모두 한(漢)나라 태위를 지냈고,아버지 주이(周異)는 낙양현의 영(令)을 지냈으며 손견의 아들 손책과는 동갑으로 친구처럼 지냈다.

 

200년에 손책이 횡사하자 다시 손권의 오른팔이 되어 208년에 전부대독(前部大督)에 임명된다. 이 해 가을 조조가 형주를 손에 넣고 다시 수십만 대군으로 쳐들어 오니 모든 신하들이 투항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주유는 자신에게 정예 3만명만 주면 조조를 무찌를 수 있다고 호기를 부린다. 여기에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제갈량이 손권에게 전쟁을 부추겨 촉 · 오 동맹이 맺어지고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소설에 그려진 것과 달리 적벽대전의 주인공 주유는 부장 황개의 화공책 건의를 수용,정보(程普) 등 수군 수만명을 보내 촉나라와 힘을 합쳐 조조와 적벽에서 싸워 크게 깨뜨리고 군선을 불태워 조조에게 타격을 입히게 된다. 전략가인 주유는 이 전쟁에서 유비가 더 큰 이득을 볼 것으로 간파하고 유비를 경계대상 1호로 지목해 상소를 올리게 된다. 당시 제갈량의 치밀한 천하삼분 전략에 의해 손권은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에게 주어 사돈을 막 맺은 상태였고,친유비파인 노숙이 형주를 유비에게 빌려주는 실책을 범했던 상황이었다.

 

유비가 천하의 효웅(梟雄)임을 간파한 주유는 위나라와 오나라의 양강(兩强) 구도 구축을 위해 심지어 사돈관계인 유비를 경구라는 곳에 가두자고까지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유비는 영웅다운 자태를 갖추고 있으며,관우와 장비 등 곰과 호랑이 같은 장수를 끼고 있으므로 틀림없이 오랫동안 몸을 굽혀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유비를 오군으로 옮겨 그를 위해 궁전을 성대하게 짓고 아름다운 여자와 진귀한 것을 많이 주어서 그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관우와 장비 두 사람을 나누어 각기 한쪽에 배치하고 저 같은 사람이 그들을 지휘해 싸우게 한다면 대사가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국지 주유전》

 

그러나 오직 북방의 조조만을 경계한 손권은 영웅을 초빙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유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적벽대전 후 조조의 좌절을 틈타 촉나라를 공격,촉을 제거하고 나서 다시 양양을 점거하고 북방의 조조마저 도모해 버리겠다는 야심을 드러내 결국 손권의 승낙을 받게 된다. 그런데 주유는 행장을 꾸려 파구를 지나다가 병으로 죽었다. 손권은 소복을 입고 애도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유의 영구가 오나라로 돌아오자 손권은 또 무호(蕪湖)로 가서 맞이하고 모든 비용을 다 대주었다. 그런 다음 명을 내려 "고인이 된 장군 주유의 집안에 있는 모든 손님에게는 부세와 요역을 물리지 말라"고 명했다.

 

경우의 수는 늘 존재한다. 만일 주유가 36세라는 나이에 병사하지 않고 유비 공격에 성공했다면 천하삼분 전략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촉한 정통론에 의해 제갈량이 주유를 무시하고,주유가 제갈량을 질시하는 장면은 정사 그 어디에도 없다. 역사와 소설,소설과 역사의 경계는 명확하지만 적어도 《삼국지》는 소설로든 역사로든 재미있는 명저 중 명저가 아닐까. 그 중심축에 삼국의 핵심 참모인 주유와 제갈량,순욱이 있는 것이다.

 

  (9)당태종 이세민열린 마음으로 당제국 반석에 올린 '소통 리더십의 제왕'

한국경제 | 입력 2010.07.09 18:31

  

구중궁궐에 갇혀 사는 군주는 사람의 장막에 가려 눈과 귀가 막히기 쉽다. 간신들이 판을 치고 올곧은 신하가 내쳐지는 이유는 의외로 자명하다.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칭찬보다 칭송과 아첨을 일삼는 것이 궁정의 속성이라고 하면 과언일까.

 

  열린 마음과 소통 리더십의 제왕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제왕적 리더십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제왕이었다. 물론 창업과정도 순탄하지 못했으니,그는 대규모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등 연이은 실정으로 민심을 잃은 수나라 양제(煬帝)를 타도하고자 태원(太原) 방면 군사령관으로 있던 아버지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설득해 병사를 일으킨다.

 

그는 먼저 설거와 설인고 부자,유무주(劉武周)와 싸우고,다시 강적 왕세충(王世充) 두건덕(竇建德)을 제거해 스무살 때인 617년에 장안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듬해 당나라가 탄생했고,이연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연은 이세민이 정권 창출에 큰 공을 세웠음에도 맏아들 건성(建成)을 황태자로 삼아 형제간 불화를 일으키는 발단을 제공했다. 건성은 동생 원길(元吉)과 함께 세민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지만 세민이 선수를 쳐 건성과 입조하는 원길을 현무문에서 죽이고는 곧바로 626년에 제위를 이어받아 즉위하니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

 

반란 과정과 피비린내 나는 형제의 난을 겪어 제위에 오른 이세민은 예악(禮樂)과 인의(仁義) 등 유학에 바탕을 둔 문치를 내세우면서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국학에는 학사(學舍)를 400여칸이나 증설하고,국자(國子) 태학(太學) 사문(四門) 광문(廣文)에서도 학생을 증원했다. 이와 동시에 도가의 무위(無爲)를 강조하고 도교를 국교로 정해 폭넓은 민심의 향방도 살폈다. 인재경영에 몰입해 자신에게 300번 이상이나 간언한 위징(魏徵)과 같은 신하들을 내치지 않고 받아들였고,8대 명신이라 불리는 소신파 신하들을 곁에 두고 스스럼없이 소통하며 다음과 같이 자기검증을 했다. '덕행을 쌓은 군주는 귀를 거스르는 말을 듣고,얼굴을 살피지 않고 하는 간언을 좋아한다. 군주가 충신을 가까이 하려면 의견을 제시하는 인사를 후하게 대우하고,참언하기 좋아하는 자를 질책하며,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것이다. '(《정관정요》)

 

그가 제위에 오른 해부터 649년에 이르는 23년 동안 정치,경제,문화,예술,군사 등 다방면에 위대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무엇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었을까. 바로 '군주는 배이고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 (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는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태종은 군주보다 백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겸손한 제왕이었다. 그가 '창업이 쉬운가,수성이 어려운가(創業易 守成難)'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초심을 잃지 않고 당 제국을 반석에 올려놓은 것이다. 후대 역사가들이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세(貞觀之治)'라고 칭송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하들의 의견을 들으려 하고,반대파를 포용한 태종은 군신관계란 신뢰로 맺어져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통치 말년에 태종은 자기관리에 허점을 드러내면서 흔들리게 된다. 지나친 영토확장 정책과 고구려 침략 실패,후계자 선정의 난항 등을 한으로 남긴 채 그가 죽자 동요된 정권은 후궁이자 훗날 고종(高宗)의 황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에 의해 잠시 동안 거의 소멸상태를 맞이하게 된다.

 

초심을 유지하고 민심의 향방을 헤아리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멀리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곧은 나무는 그림자가 굽을까 걱정하지 않는다'(정관정요)고 하지만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분명한 것은 현명한 신하를 곁에 두는 자도 군주요,내치는 자도 군주라는 사실이다. 모든 것을 제탓으로 돌리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다.

 

(10)소하(蕭何)‥유방 보좌해 제국 창건…견제 속에서도 화를 피한 처신의 달인

 

소하(蕭何)는 고조 유방의 오랜 친구로 유방이 기병할 때부터 줄곧 그를 도와 한나라를 세운 다섯 공신 가운데 으뜸이었다. '성공해도 소하요,실패해도 소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창업에서 그의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불후의 공적을 세웠던 그였으나 조정 무관들의 견제와 함께 유방의 끊임없는 의심을 받아 전전긍긍하면서도 결국 무난히 난세를 살다갔다.

 

《사기》의 '소상국(蕭相國)세가'에 따르면 소하는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람으로 법률에 통달해 일처리하는 것이 공평하고 유방이 벼슬하지 않고 있을 때 벼슬아치 신분으로 그를 보호해줬다. 고조가 작은 관리로 도적을 체포하는 일에 관여할 때도 소하는 늘 곁에 있었으며,고조가 벼슬하러 함양에 갔을 때도 소하만은 남들보다 더 많은 500전을 주었다고 한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켰을 때 여러 장수들이 재물창고로 달려가 그것들을 나누어 가졌으나,소하는 진나라 승상부(丞相府)와 어사부(御史府)의 법령과 도서들을 거두어서 감추었다. 유방이 한왕(漢王)에 오르자 소하는 승상이 되었다. 함양이 불타 모든 문서가 사라졌으나 소하가 확보한 자료를 통해 유방은 요새의 위치나 인구 등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도 소하는 승상으로 남아 파촉(巴蜀)을 지키며 지역을 안정시키고 보좌했다. 그는 법령과 규약 등을 만들 때도 고조의 재가를 받고 나서 일을 처리해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한 제국이 세워지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신하들은 저마다 공을 내세웠다. 소하의 공을 첫 번째로 두려는 유방에게 공신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자신들은 전장에서 100번이나 수십번씩 싸워 땅을 빼앗았는데 소하는 겨우 글이나 읽고 의논이나 했으니 그에게 최상위 등급을 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유방은 사냥개와 사냥의 차이를 비유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사냥에서 들짐승과 토끼를 쫓아가 죽이는 것은 사냥개지만,개 줄을 풀어 짐승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은 사람이오.지금 여러분들은 한갓 들짐승에게만 달려갈 수 있는 자들뿐이니,공로는 마치 사냥개와 같소.소하로 말하면 개의 줄을 놓아 방향을 알려주니 공로는 사냥꾼과 같소."

 

여러 신하들은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신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고조는 소하에게 많은 봉읍을 내렸다. 그런데 작위를 첫 번째에 두려고 하니 일등공신 자리를 놓고 다투는 조참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 관내후(關內侯) 작위 이름으로 스무 등급 중 열아홉 번째인 악군(鄂君)이 "소하가 첫 번째이고,조참이 두 번째"라고 진언했다. 결국 유방은 소하를 첫 번째로 하고,소하가 칼을 차고 신을 신고 궁전에 오를 수 있도록 할 정도로 예우했다. 그러고 나서 6년 후에 진희가 모반하고 회음후(淮陰侯 · 한신)가 모반했다가 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방은 모반 평정에 공을 세운 소하에게 식읍 5000호를 더하고 군사 500명과 도위(都尉) 1명을 보내 상국의 호위병으로 삼도록 했다.

 

모두들 소하에게 축하하는 상황에서 소평(召平)이란 자는 유방이 당신을 떠보기 위한 것이니 봉읍을 받지도 말고 오히려 당신의 재산을 군비에 보태라고 조언하자 소하는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유방은 소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면서 그의 동태를 살폈다. 소하는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화살을 피해갔다. 그러나 결국 유방은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그를 일시나마 족쇄를 채웠다가 풀어주는 우를 범한다. 물론 겉으로는 관계가 회복된 듯했으나 그것은 미봉에 불과했을 것이다.

 

소하는 자신의 후임으로 관계가 좋지 않았던 조참을 추천하고 밭과 집을 살 때 반드시 외딴 곳에 마련했고,집을 지을 때에도 담장을 치지 않았을 정도로 검소했다.

 

정권이 탄생하고 그 정권의 일등공신이 돼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늘 그것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존재한다. 게다가 절대 권력자의 불신과 감시마저 받는 경우 처신은 더욱 힘들 수 있다. 만일 소하처럼 버려야 할 곳과 버릴 것을 알고 청렴하고 소신있게 일한다면 화는 피할 수 있지 않을까.

 

 

(7) 순욱(荀彧), 천하의 흐름 정확히 읽어내…위나라 창업의 일등공신 역사

 

주군의 인물됨을 평가해 그 밑에 있을 자리가 아니면 과감히 버리고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결단의 소유자들 가운데 손꼽히는 인물이 순욱이다. 위나라 창업공신인 그는 곽가와 정욱을 조조에게 추천해 등용케 했으며 천하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는 안목을 갖췄다. 비록 말년에 주군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근심 속에 죽었지만 확고한 소신과 명분으로 거의 20여년간 조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 '순욱전(荀彧傳)'에 의하면 그의 자는 문약(文若)이다. 영천(潁川) 영음(潁陰) 사람이다. 조부 순숙(荀淑)은 순제(順帝)와 환제(桓帝) 때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팔룡(八龍)이라고 부를 만큼 뛰어난 자식들도 여덟이나 두고 있었다. 순욱의 부친도 제남국(濟南國) 재상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런 그가 당시 북방 원소의 모사로 있었으나,겪으면 겪을수록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한 스타일에 실망해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조조에게 귀의하기로 결단을 내린다. 환관 출신으로 조정 기반이 약한 조조는 순욱을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고 극찬하며 위나라 창업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된다.

 

순욱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조조와 원소의 일전인 관도대전에서 공융(孔融) 등 대다수의 모사들 뿐 아니라 조조마저 회의적으로 판단하는 상황을 일거에 잠재우고 넓은 영토와 강성한 군대,모사 전풍과 허유,충신 심배와 봉기,용장 안량과 문추 등 막강한 인재군을 거느린 원소를 무너뜨린 전략가였다.

 

당시 조조의 군사는 원소의 10분의 1 정도로 1만명이 채 못 됐다. 그중 부상을 입은 자가 2000~3000명에 달했고 군량미도 떨어져가고 있던 다급한 상황이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조조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수도인 허도로 돌아갈 방법을 상의했다. 이때 순욱은 이런 답장을 보냈다.

 

"상대를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짓밟히게 되니,지금이야말로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입니다. 더구나 원소는 평범한 일개 우두머리에 불과하므로 인재를 모아도 쓸 줄은 모릅니다. 공 '조조'의 뛰어난 무용(武勇)과 밝은 지혜에 의지하고 천자의 이름을 받들어 원소를 토벌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순욱전)

 

그러면서 네 가지 승리의 당위성을 제시했으니 재능에 따라 적당한 자리를 주는 공정함,결단력과 임기응변의 전략,신상필벌의 엄격함,천하의 인재들을 몰리게 하는 인덕 등이 조조에게는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단력에 조조는 결전을 마음먹고 천하쟁패를 위한 전쟁을 하게 된다.

 

결국 원소는 휘하의 많은 인재들을 등용하지 못하고 심지어 세 아들과도 불화하는 등 인화에 실패해 관도대전에서 대패,죽음을 맞이한다. 역으로 조조는 북방의 요충지를 거의 장악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잘 되어가던 건안 17년(212년)에 동소(董昭) 등은 조조의 작위를 국공(國公)으로 올리고 구석(九錫)의 예물을 갖추어 그의 뛰어난 공훈을 표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밀히 순욱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순욱은 신하의 명분을 강조하면서 반대한다. 이런 일로 인해 조조는 순욱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정사는 적고 있다.

 

물론 조조가 막내인 조식을 후계자로 정하는 문제로 상의했을 때에도 순욱은 적장자론을 내세워 조비를 세워야 한다고 간언한 적이 있어 조조는 내심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의도적인 내침을 당한 순욱은 나이 쉰에 근심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삼국지》에서는 조조가 눈엣가시인 순욱에게 밥그릇이 빈 밥상을 하사해 순욱이 조조의 의중을 알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살하는 장면으로 처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나관중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3) 안회(顔回)‥위선을 벗어던지고 정도를 걸으니…공자가 가장 아꼈던 애제자 

 

강요된 시선과 사회의 편견,제도의 틀 속에 갇힌 채 하루하루 살다보면 명예나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는다. 한번쯤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의 내면을 비춰보라.삶의 행복과 이것을 지탱해 주는 힘이 사소한 데서 나온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안회(顔回 · 기원전 521~490)는 약소국인 노(魯)나라 출신이다. 공자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수제자이자 학문과 덕행의 대명사다. 장자에게도 군자로 높이 평가받았던 안회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스승 공자의 말에 어김이 없고 우직하게 행동해 겉으로 보면 아둔할 정도인 안회는 공자가 자신의 말에 한번도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을 못마땅해 할 정도로 무비판적이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때에도 늘 자신의 뜻을 헤아리면서 하나하나 실천해 보였던 제자였다. 안회의 어리석음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이지 내면은 어느 제자보다도 가득 차 있었다.

 

《논어》에 수없이 등장하는 안회를 보면 공자가 지독하게 아꼈던 제자임을 실감할 수 있다. 3000명의 제자 가운데 핵심 인물은 77명.그중에서도 안회를 대하는 공자의 모습은 때로 평정심을 잃었다 할 만큼 칭송 일관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밥 한 소쿠리와 마실 것 한 표주박을 마시며 누추한 마을에 살게 되면 보통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안회야말로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在陋巷,人不堪其憂,回也不改其樂.賢哉,回也)"<옹야(雍也)>

 

공자는 서른 살이나 어린 제자 안회를 '현자(賢者)'라고 일컬으며 총애했다. 스승이 자식뻘 되는 제자를 그토록 아낀 것은 안회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정신 때문이었다. 안회는 가난이 뼛속에 스며들 정도의 힘든 역경 속에서도 여유롭게 본분에 충실했다. 공자는 수제자로 칭송하던 안회를 두고 "어기지 않는 게 어리석은 것 같다(不違如愚)"며 다소 모자란 듯한 '불급(不及)'의 처세를 평가했다.

 

안회의 이런 모습은 공자가 '구름 같은 존재'로 평가한 노자의 모습과도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공자는 그토록 갈망했던 관직을 얻지 못하고 14년 이상 북방 제후국을 떠돌아다닌 자기 처지에 회한이 서려 있었다. 다른 제자들 대부분이 공자의 그런 모습을 추종했지만,안회는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면서 스승 공자에게 그런 길의 덧없음을 얘기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안회는 겨우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亡我)"라고 통곡하며 제자의 이른 죽음을 애달파했다. 이런 생각은 사마천에게도 그대로 다가왔다. 그는 《사기》 <백이열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중략) 또 공자는 제자 일흔 명 가운데서 안연이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안연은 늘 가난해서 술지게미와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끝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려 준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

 

사마천의 푸념처럼 세상에서 인과응보니 권선징악이니 하는 말들이 꼭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많다. 청빈의 자세로 자신을 추스르면서 살다 요절한 안회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하늘의 도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유효한 채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에 그렇다.

 

행복을 찾기 위해 너무 바쁘고 힘들게 뛰어다니지 말자. 이런 우스갯소리도 있다. 금(金)이 세 개 있으니 황금,소금,지금이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좀 더 여유를 가지고 안빈낙도의 정신을 음미해 보라. 풋풋했던 학창 시절의 스승을 찾아 가르침과 추억을 되새겨보며 그 시절로 돌아가 보자. 행복은 가까운 데에 있다.

 

 (1) 이사 : 줄서기 세상 절대 권력을 좇았더니…  

 

선거철은 이합집산의 계절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소신이 있느니 없느니 탓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장수선무(長袖善舞)라는 말대로 소매가 긴 사람이 춤을 잘 춘다. 조건이 좋으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고,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출세하는 데 분명 유리하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운명이 바뀐 사례로 이사(李斯)만한 사람이 없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이사는 초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젊어서 군에서 낮은 벼슬아치 노릇을 했다. 어느 날 그는 쥐 두 마리를 보고 처세의 원리를 깨쳤다. 변소에 있는 쥐는 사람이나 개가 나타나자 깜짝 놀라 도망을 갔다. 그런데 창고 안에 있는 쥐는 쌓아놓은 곡식을 먹으면서 '여유있게' 지내며 사람이 나타나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이사는 두 쥐를 보고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다고 하는 것은,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해 있는 곳에 달렸을 뿐이다(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라며 출세를 위해 새로운 모험을 하기로 다짐한다. 곧바로 진나라로 향한 그는 당시 승상인 여불위(呂不韋)를 찾아가 그의 사인(舍人),즉 집사가 됐다. 이후는 출세가도였다. 진시황의 생부이기도 했던 여불위가 추천해 진시황을 만난 그는 막강한 진나라에 눌려 바짝 엎드려 있는 다른 6개국이 힘을 합쳐 합종하기 전에 그들의 의도를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시황은 그를 궁궐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관리의 우두머리인 장사(長史)로 삼는다.

 

절대 권력자의 신임을 얻은 이사는 제후국을 돌아다니며 뇌물도 주고, 협박도 하며, 이간책도 쓰는 등 갖은 계략을 동원하여 결국 객경(客卿)이 된다. 그 사이에 자신을 찾아온 한비자(韓非子)도 제거하는 무자비함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한비자는 그와 함께 순자(荀子)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한 동문이었다.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이사는 기존 세력들이 자신을 내쫓으려 진시황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유명한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진시황에게 올렸다. 진 목공이 다섯명의 인재를 타국에서 데려와 서융의 우두머리가 된 것은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태산은 흙을 사양하지 않고 큰 강과 바다는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란 열린 마인드를 지녔던 덕분이라며 비유적으로 진시황을 추켜세우고 개방인재론을 설파했다. 이 한마디로 그는 오히려 권력의 주류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가혹한 조치로 사상과 문화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등 각 방면에 일대 개혁을 단행하면서 진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로 자리를 굳혔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찌 그런가. 제비나 참새가 지붕이나 처마 밑을 떠나게 되면 매나 송골매에게 잡혀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다. 나보다 강한 자는 어디든 존재하는 법이다. 이사 못지 않은 권력욕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잔뜩 몸을 움츠리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환관 조고(趙高)였다. 50세에 객사한 진시황을 이어 영원히 재상 자리를 유지하려는 이사의 야심을 알았던 조고는 회유와 협박이라는 전략적 카드를 쓰며 이사를 흔들었다. 결국 이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유서위조 사건에 연루되면서 허리가 베이는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이사보다 강한 자는 그가 그토록 경계했던 몽염(蒙恬)장군이 아니었다. 만리장성을 짓는 공을 세워 진시황의 총애를 받은 몽염이 이사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엉뚱하게도 평소 "궁궐에서 잡일이나 한다"던 환관 조고에게 당하고 말았다. 이사는 죽음 앞에서 세상의 이치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 탄식했지만 결국 그 비극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었던 셈이다.

 

좋은 자리,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자신의 몰락을 예견하는 자는 드물다. 권세를 가지고 있다 보면 아무래도 거기에 탐닉되어 오만방자해지게 돼 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겸손의 미덕을 쌓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다. 미래를 낙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살아가는 자기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당선되는 그 날로 이런 다짐부터들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