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노래의 날개 위에(감상,기악)

3-3) 고전주의(Classic)

우렁터 2013. 1. 27. 14:39

3) 고전주의(Classic)

 

10.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 7. 2.-1787. 11.15)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초기를 제외하고 창작활동은 거의 한결같이 극음악(劇音樂)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오페라 창작은 43곡에 이르러 18세기의 오페라 개혁자라고도 불리며 오페라사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737-1741년에 밀라노에서 작곡가 G.B.삼마르티니의 지도를 받았는데, 그 곳에서 1741년 12월에 초연된 <아르타세르세>가 이후 거의 40년간에 걸친 오페라 창작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1745년 런던으로 건너가 자작을 상연하였고, 이어 순회공연단에 가담하는 등 각지를 전전한 다음 1752년 말 이후 빈에 정주하엿다. 이때까지 16곡의 오페라를 창작하였는데, 대체로 전통적인 이틸리아 오페라 양식을 따르고 있었다. 빈에서는 프랑스대사를 거처 재상으로 취임한 W.A. 카우니츠의 주도로 연극계에 프랑스 취미가 도입되기 시작하여, 글루크는 우선 프랑스의 오페라 코믹을 빈 풍으로 개작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래서 그 자신도 1758년 부터 1764년까지 8곡의 오페라 코믹을 썼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속에 프랑스 정신을 융화시키고 그 위에 음악과 연극의 밸런스를 새롭게하는 , 이른바 <개혁 오페라>가 대본작가 R.칼차비치의 협력하에 생겨났다.

 

그 목표는 불필요한 음악적 장식과 가수의 기교를 우선시하는 것을 배제하고, 단순. 진실. 자연을 최대 길잡이로 하여  <시에 표현을 주고 극적 상황을 강조한다>는 오페라 본래의 목적에 따라 음악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1762)>, <알체스테(1767)>, <파리드와 엘레나(1770)>, 가 쓰였다. 1773- 1779년에는 다섯차례 파리를 방문하여 재차 프랑스어로 오페라를 썼고, 또 이탈리아어로 된 구작을 프랑스오페라로 개정.상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1774)>, <알미드(1777)>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1779)>는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파리에서의 성공을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전해 들은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는 1774년에 그를 빈의 궁정작가로 임명하였다.

 

한편 파리에서 그는 1752년의 푸퐁논쟁 이후로 해결이 안된 프랑스 오페라 대 이탈리아 오페라의 우열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려 N.피치니와 동일한 대본으로 작곡을 경쟁한 이른바 '글루크-피치니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1.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3.31~1809.5.31]

 

요약

18세기 후반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작에《천지창조》, 《사계(四季)》등이 있다.

 

별칭 교향곡의 아버지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음악

출생지 오스트리아 로라우

주요작품 《천지창조》(1798), 《사계》(1801)

 

본문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파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동부의 작은 마을에서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5세 때 친척인 초등학교 교장이자 교회음악가인 프랑크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740년 빈의 성스테파노대성당의 소년합창대에 들어간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총애를 받았으나 1749년 변성기에 들어가자 합창대를 나와 그때부터 빈에서 자유롭기는 하였지만 불안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이 1759년까지 10년간이나 계속되고 그 동안의 자세한 경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한편, 어느 시기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인 N.포르포라에게 작곡을 배우기도 하고 음악 애호가인 귀족 툰백작부인의 하프시코드 교사가 되기도 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귀족 퓌른베르크남작 집안의 실내음악가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한다. 또 스테파노대성당 등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가수로서 예배주악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밤에는 세레나데악단에 참여하여 빈거리로 나와 돈을 버는 일도 하였다.

 

이처럼 고생을 하면서 음악과 더불어 살아간 그는 10년 후인 1759년 마침내 보헤미아의 모르친백작 집안 궁정악장(宮廷樂長)에 취임하였다. 보헤미아에 부임한 하이든은 그곳에서 초기의 교향악과 관악합주인 디베르티멘토를 작곡하였다. 그러다가 백작의 집안 재정상태가 핍박하여 악단이 해산되는 바람에 다시 실업자가 되어 빈으로 돌아왔고, 1760년 11월 가발업자의 딸 마리아 안나 켈라와 결혼하였다. 1761년 5월 1일 하이든은 헝가리의 귀족 에스테르하지후작 집안의 부악장(副樂長)에 취임하였다. 당시의 악장은 G.베르나였으나 그가 사망한 1766년부터는 하이든이 명실상부한 그곳 악장으로 승진하였다.

 

에스테르하지후작의 집에서는 하이든이 1790년까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충실한 악장으로 근무하였다. 그 동안에 많은 교향곡·현악4중주곡·오페라 등을 작곡하였는데 특히 교향곡과 현악4중주곡 등 실내악·클라비어소나타 등 기악곡에 있어서는 고전파의 규범이 되는 형식을 창조하고, 1781년에는 소나타형식의 전형으로 간주되는 6곡으로 된 《러시아4중주곡》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모차르트에게도 영향을 준 작품이다. 그리고 1780년대에는 파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6곡의 《파리교향곡》을 비롯하여 《토스토교향곡》(2곡) 《도니교향곡》(3곡) 등 명작을 잇달아 작곡하였다. 1790년 9월 그가 오랜 세월을 모시던 니콜라우스 에스테르하지후작이 사망하자 그는 명예악장이라는 칭호를 받음과 함께 그 직을 물러나 빈에서 살았다.

 

이 무렵 독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서 런던에서 오케스트라를 거느리고 성공을 거둔 J.D.잘로몬의 권유로 그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791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런던에서 오케스트라시즌에 출연하였는데 그는 《잘로몬교향곡》(제1기, 6곡)을 작곡하여 크게 성공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의 칭호를 받았다. 그런 성과에 크게 자극을 받은 하이든은 1794년에서 이듬해에 걸쳐 다시 영국을 방문, 《잘로몬교향곡》(제2기, 6곡)을 작곡하였다. 만년의 하이든은 다시 에스테르하지 집안의 악장으로 되돌아갔으며 뛰어난 미사곡 6곡을 작곡하고 또 두 개의 오라토리오의 대작 《천지창조》와 《사계》를 작곡하였다.

 

하이든은 젊은 모차르트와 친교가 있었는데 첫번째 영국 체류 중이던 1791년에 모차르트는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런던에서 독일로 돌아가던 1792년, 본에 들렀던 하이든은 거기서 처음으로 젊은 베토벤을 만났으며 그후 잠시 빈에서 그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베토벤이 왕성한 작곡활동을 하게 될 무렵에는 은퇴하여 여생을 즐겼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제2회 빈 공략의 포성을 들으면서 77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쳤다.

 

12. 보케리니 [Luigi Boccherini, 1743.2.19~1805.5.28]

 

이탈리아의 작곡가 ·첼로 연주자. 미뉴에트만으로 알려졌으나 교향곡, 첼로협주곡, 현 또는 현과 피아노를 위한 실내악 등을 통해 F.J.하이든을 잇는 세대의 고전파작곡가로 높이 평가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주(州) 루카 출생.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은 후, 1757년 로마에 유학하였다.

 

그 후 첼로 주자로 독립, 바이올린 주자인 만프레디와 연주여행을 하여 파리 등지에서 호평을 받고 이어 에스파냐의 궁정악사가 되었으나, 1787년 이후는 베를린에서 궁정작곡가로서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위한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프로이센왕 사후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갔으나 에스파냐궁정의 냉대로 빈곤 속에 마드리드에서 죽었다. 전에는 미뉴에트만으로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교향곡, 첼로협주곡, 현(弦) 또는 현과 피아노를 위한 실내악 등의 작품을 통하여 F.J.하이든을 잇는 세대의 고전파작곡가로 높이 평가된다.

  

 

13. 모차르트 [Wolfgang Amadeo Mozart, 1756.1.27~1791.12.5]

 

요약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고 전고전파의 여러 양식을 흡수,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했다.

 

국적 오스트리아

출생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주요수상 황금박차(拍車)훈장

주요작품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마적》(1791)

 

본문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을 보여 4세 때 건반 지도를 받고 5세 때 소곡(小曲)을 작곡하였다. 아버지는 그의 뛰어난 재능을 각지의 궁정에 알리기 위하여 아들이 6세 되던 해부터 여행을 계획하여 1762년 7월 바이에른 선거후의 궁정이 있는 뮌헨에 가서 연주하고, 이어 빈으로 가서 여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연주하는 등 많은 일화가 있다.

 

작곡가로서 그의 활동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준 것은 서유럽을 거의 일주하다시피 한 여행(1763∼1766)이었다. 여행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J.쇼베르트(1720?∼1767), 런던에서 알게 된 J.C.바흐(J.S.바흐의 막내아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파리에서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런던에서는 최초의 교향곡(제1번 Eb장조) 등을 작곡했는데, 이 교향곡은 8세 때의 작품이었다.

 

두 번째로 빈을 다녀온 뒤, 1769~1773년에는 3번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는데 그동안 교황에게서 황금박차(拍車)훈장을 받고,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입회시험(入會試驗)에 뛰어난 성적으로 합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볼로냐에서 마르티니로부터 음악이론·작곡을 배운 일과 이탈리아의 기악·성악에 직접 접한 일 등은 그후의 교향곡·오페라·교회음악 창작에 풍부한 자극이 되었다. 그는 이때 10대 소년으로 오페라의 작곡 의뢰를 받고 밀라노에서 작곡한 오페라를 상연(1770)하였는데, 제2회(1771)와 제3회(1772∼1773)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 곳에서 오페라를 작곡 상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후 1777년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미사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차차 그 직무에 불만을 갖기 시작하여 1777년 가을부터 1779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다른 궁정에 취직하기 위하여 만하임·파리를 여행하였다.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음악면에서는 만하임악파와 접촉하는 등 수확이 컸고 이때 《파리교향곡》(1778) 외에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다. 또한 만하임에서의 아로이지아 베버와의 사랑, 파리에서의 어머니의 죽음 등 인생의 경험도 많이 하였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궁정음악가로서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780년 말 뮌헨궁정으로부터 의뢰받은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상연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와의 불화가 표면화하여,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와 사표의 반려에도 불구하고 빈에서 살기로 결심, 그의 인생의 후반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빈에서는 처음 작곡·연주(피아노)·교육활동을 하였으며, 오페라 《후궁(後宮)으로부터의 도주》(1782)와 《하프나교향곡》(1782), 피아노협주곡 등을 작곡하였고 1782년 8월에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로이지아의 여동생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그가 빈에 머무는 동안에 작곡한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의 것과 함께 고전파시대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확립하는 작품이 되었다. 하이든과는 1785년경에 직접 알게 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빈시대의 후반에 접어들자 모차르트의 작품세계는 한층 무르익었으나, 그 반면 빈의 청중들의 기호로부터는 차차 멀어져, 생활은 어려워지고 친구들로부터 빌린 빚도 많아졌다.

 

1786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그러한 상황이 눈에 띄게 나타났는데 《피가로의 결혼》(1786)이나 《돈 조반니》(1787) 등의 오페라는 이 시기의 걸작들이다. 후자가 초연(初演)된 해 4월 베토벤이 찾아왔고 5월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구르크의 뒤를 이어 궁정실내작곡가의 칭호를 받았으나, 이것은 이름뿐이고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에는 경제적 궁핍 속에서 이른바 3대교향곡 《제39번 E장조》 《제40번 G단조》 《제41번 C장조:주피터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그뒤에도 모차르트는 몇 차례 여행을 하였다. 1789년의 베를린 여행에서는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알현하여 작곡의뢰를 받았다.

 

이듬해 초에는 오페라 부파 《코시 판 투테》를 완성하고, 가을에는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대관식협주곡》 등을 포함한 연주회를 열었으나 빚은 늘어날 뿐이었고 1791년 8월 의뢰받은 오페라 《티투스제(帝)의 인자(仁慈)》의 상연을 위하여 프라하로 여행하였으나 이 때부터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9월에는 징그슈필의 대작 《마적(魔笛)》을 완성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레퀴엠》을 미완성인 채 남겨 두고 12월 5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빈시의 성마르크스묘지에 있다.

 

36세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생애였으나, 어려서부터 창작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남긴 작품은 성악·기악의 모든 영역에 걸쳐 다채롭다. 그의 공적은 하이든과 함께 빈고전파의 양식을 확립한 데 있으며, 그를 앞섰던 이른바 전고전파(前古典派)의 여러 양식을 한몸에 흡수, 하이든과도 뚜렷이 구별되는 개성적인 예술을 이룩하였다.

 

모차르트의 교향곡

 

9세 때부터 작곡하기 시작한 교향곡은 그 수가 50여 곡에 달한다. 작품 목록에 정식으로 자리잡은 41곡

의 교향곡을 살펴보면 초기의 교향곡은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오페라 서곡이나 전고전 시대의 J. C. 바

흐의 교향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점차 만하임 악파와 빈 고전파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빈에 정착하기 이전인 1773년 말부터 1774년 초에 작곡된 G단조(K.183)와 A장조(K.201)에는 질풍노도

양식의 강한 감정표현이 나타난다. 주제의 통일과 형식의 확장은 이미 고전양식에 숙달되었음을 보여 준

다. <파리>교향곡(K.297)과 잘츠부르크에서 쓴 C장조(K.338)는 잦은 여행을 통해 얻은 성과로 보여지며

이후 빈에 정착하면서 작곡한 6개의 교향곡은 고전 교향곡의 걸작품들이다.

 

세레나데로 작곡된 곡을 교향곡으로 전용(轉用)한 <하프너>교향곡(K.385), 느린 서주부가 1악장에 삽입

되어 하이든적(的)이라는 평을 받는 <린츠>교향곡(K.425), 서주부가 있는 3악장의 <프라하>교향곡

(K.504), 그리고 모차르트 최후의 3대 교향곡 Eb장조(K.543), G단조(K.550), C장조(주피터, K.551)

이 6개의 교향곡에 해당된다. 1788년, 불과 40여일 만에 작곡된 마지막 3대 교향곡은 모차르트를 대

표하는 교향곡일 뿐만아니라 고전 시대 교향곡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백조의 노래'라는 별명이 제39번 Eb장조 K.543)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형식으로 하이든의 영향이

짙게 나타난다. 우아하면서도 경쾌함이 있는 이 작품의 미뉴에트 악장은 특히 유명하다.

 

제40번 G단조(K.550)는 우울한서정성이 긴장감을 유지하며 전개된다. 비극적 우아함으로 표현되는

이소스(pathos)적인 감동은 낭만주의 음악을 예견케 한다.

 

제41번 C장조(K.551)는 <주피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교향곡이다. <주피터>라는 제목처럼 스케

일이 크고 장려하다. 제1악장에 나타나는 목관악기의 대위선율과 제4악장의 푸가 기법은 이 작품을 화성

양식과 대위법 양식의 융합으로 이끌어 가는 모차르트의 독창적인 창작기법을보여주고 있다.

14.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2.17~1827.3.26]

 

요약

하이든 ·모차르트와 함께 빈고전파를 대표하는 독일의 작곡가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을 개성적으로 다듬었고 낭만파로의 이행단계에 있다. 작풍은 동적인 힘이 특징이고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후기에는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있다.

 

국적 독일

출생지 독일 본

주요작품 《영웅교향곡》(1804)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본문

본 출생. 할아버지 루트비히와 아버지 요한도 음악가였으며 악재(樂才)를 인정한 아버지는 아들의 천재적 소질을 과시하려고 4세 때부터 과중한 연습을 시켰으며, 7세 때에는 피아노 연주회까지 열었다.

 

베토벤은 몇몇 선생의 지도를 받았는데 1779년에 그를 가르친 크리스찬 고트로프 네페로부터는 음악뿐만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인 영향까지 받았다. 1782년 궁정예배당 오르간 연주자로 출발, 2년 만에 정식 멤버로 임명되고 1787년에는 빈에 가서 흠모하던 모차르트를 만났으나, 어머니의 위독으로 곧 본으로 돌아와 이 해에 끝내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대신하여 집안을 떠맡았다.

 

그러다가 1792년 바르트슈타인백작을 비롯한 친구들의 원조로 빈에 유학, 결국 그 곳이 그의 영주의 땅이 되었다. 빈에 자리 잡은 베토벤은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셴크 ·알브레히트베르거 ·하이든 ·살리에리 등에게 사사하여 음악가로서의 지식과 능력을 키워 나갔다.

 

1795년 피아노 연주자로서 데뷔하고 이 시기에 최고 작품으로 꼽히는 《피아노 3중주곡》을 발표하여 착실한 첫발을 내디뎠다. 1796년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여행하고, 1800년에는 《제1교향곡》과 6곡의 현악4중주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귓병이 나서 점차 악화하였다. 절망한 그는 1802년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쓰고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 작곡에만 전념했으며 두문불출로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제2교향곡》(1802), 오라토리오 《감람산상(橄欖山上)의 그리스도》(1803), 그리고 1804년에는 《제3교향곡(영웅교향곡)》을 작곡하여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개성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1805년 오페라 《피델리오》의 초연에 실패하고, 이듬해 이를 손질하여 재연하였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작품이 최종적인 형태로 무대에서 인정을 받은 것은 1814년의 일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빈을 비롯하여 유럽 각지의 출판사가 앞을 다투어 간행하였다. 출판에서의 보수와 귀족들의 지원으로 모차르트와는 달리 안정된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후원자로서 특히 유명한 귀족은 루돌프대공(大公), 롭코비츠공작, 킨스키공작 등이었다. 1810년에는 괴테의 극시(劇詩)로 《에그몬트》를 작곡하였다. 그 후에 유명한 《영원한 연인》에 부치는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누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며, 그러한 여성에의 동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영웅교향곡》이 작곡된 이후의 약 10년간은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향곡 ·서곡 ·협주곡 ·피아노소나타 ·바이올린소나타 ·기타 실내악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특히 《제5교향곡(운명교향곡)》(1808) 《제6교향곡(전원교향곡)》(1808) 《피아노협주곡 제5번(황제)》(1809) 《바이올린협주곡》 (3곡, 1806), 피아노곡 《아파시오나토 소나타》(1805) 등이 유명하다.

 

1815년 이후의 12년간은 베토벤의 창작기 중에서 후기에 속한다. 이 무렵에는 정치와 사회 정세의 변화도 있었고, 친지(親知)도 적어졌으며, 또 귓병의 악화로 완전히 귀머거리가 되어 필담(筆談)을 통해서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연주회 횟수도 줄었고, 빈에서는 보다 가벼운 음악이 애호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의 일련의 창작활동은 1817년에 가장 저조했으나, 그 이후 다시 힘찬 작곡활동을 계속하여 뛰어난 대작들을 내놓았으며, 루돌프대공에게 바친 《장엄미사곡》(1823)과 합창을 포함한 《제9교향곡》(1824)이 그 정점을 이루었다.

 

장례는 29일에 거행되었는데, 2만을 넘는 시민들이 참가, 애도하였다고 한다. 베토벤은 하이든 ·모차르트와 더불어 빈고전파(古典派)를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확립한 고전파의 형식이나 양식은 베토벤에 의하여 더 개성적으로 다듬어졌으며, 또한 그의 손으로 낭만파에의 이행(移行)도 준비되었다.

 

본 시절에는 만하임악파의 영향 아래 습작적인 작품을 썼으나, 벌써 이때부터 개성적인 특징이 엿보였다. 1800년 전후에는 특히 하이든에게 받은 영향을 나타내면서도 개성적인 스타일의 작품들을 거쳐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를테면 정적(靜的)인 고전성(古典性)에 비하여 베토벤의 작품은 동적인 다이내믹한 힘을 특징으로 하는데 형식적으로는 강고한 형식감(形式感)으로 일관되어, 곡마다 독자적인 스타일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후기의 창작활동은 중기에 비하여 다이내믹한 힘은 부족하지만, 보다 깊은 마음의 세계가 표현되어 신비스러울 정도의 감동적인 스타일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는 낭만파의 초기의 대표자들인 베버나 슈베르트의 활동과도 겹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베토벤의 작품들은 그후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음악가이면서도 청각을 잃었지만, 이를 극복한 정신력은, 인간의 집념과 생활태도의 귀감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고 있다.

 

베토벤의생애

 

요약

프랑스의 소설가 겸 극작가·평론가인 로맹 롤랑(Romain Rolland:1866~1944)의 전기물.

 

원어명 La Vie de Beethoven

저자 로맹 롤랑

장르 전기

발표 1903년

 

본문

1903년에 발표된 루트비히 베토벤(Ludwig Beethoven)의 전기(傳記)이다.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로맹 롤랑은 19세기말 물질주의와 이기주의적 사조로 침체된 유럽문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으로 예술가들의 생애를 조명해내는 작품을 썼는데 , 이 작품을 비롯해 《미켈란젤로의 생애 La Vie de Michel-Ange》(1905)와 《톨스토이의 생애 La Vie de Tolstoi》(1911)가 대표적이다. 훗날 이들 전기는 《탁월한 사람들의 생애 Les Vies des Hommes illustres》라는 표제 아래 1권으로 정리되어 출판되었다.

 

롤랑은 책의 서언에서 '영웅이란 오랜 세월의 초인적 분투와 노력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인류에게 용기와 위안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으로,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이야말로 영웅 대열의 맨 앞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베토벤은 제9교향곡 《합창》을 작곡할 당시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궁핍하고 조카에게 배신당하는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슬픔과 절망의 심연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영원불멸의 음악을 만들어냄으로써, '인생이란 고뇌 속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풍요하고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연대기 위주의 영웅적 전기물과는 달리 인간 베토벤의 실제 용모와 성품 및 정신적 고뇌를 생생히 그려낸 작품으로 베토벤을 다룬 많은 전기물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명저로 평가된다.

 

 

15. 요한 네포무크 훔멜 (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

 

훔멜(Hummel)은 헝가리 태상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하이든이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동시대에 빈(Vienna)에서 활약했던 음악가이다. 훔멜의 작품은 고전에서 낭만주의로 전환되는 과도기의 음악을 반영하는 것이다. 훔멜의 오페라는 거의 잊혀져 있으나 그의 피아노 작품 등은 아직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훔멜은 프레쓰부르크(Pressburg: 현 슬로바키아의 Brastilava)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셉 훔멜은 오스트로-헝가리제국 군악학교 교장이었으며 비엔나의 쉬카네더(Schikaneder: 모차르트의 마적 대본 작성자)극장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다. 어느날 요한 훔멜을 만난 모차르트는 어린 훔멜의 재능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자기가 데리고 피아노와 작곡공부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 때 모차르트는 30세였고 훔멜은 8세였다. 훔멜은 2년동안 무료로 모차르트의 집에서 기숙하며 지냈다. 아마 모차르트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은 사람은 역사상 훔멜이 처음일 것이다. 피아니스트로서 훔멜의 첫 무대 연주는 9살 때 모차르트의 콘서트에 출연한 것이었다.

 

훔멜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자랑스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훔멜의 아버지는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어린 모차르트를 데리고 유럽 순회연주를 다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린 훔멜을 데리고 유럽 순회연주를 떠났다. 우선 도착한 런던에서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런던에서는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Muzio Clementi)가 훔멜에게 레슨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훔멜은 런던에서 4년을 보냈다. 어느날 런던을 방문한 하이든이 훔멜의 재능을 보고 감동격하여 얼마후 훔멜을 위해 소나타를 작곡해 주었다. 피아노 소나타 A플랫이었다. 훔멜은 이 소나타를 하이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런던의 하노버연주회장에서 당당하게 초연했다. 하이든은 어린 훔멜에게 자기의 곡을 연주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하고 1기니의 돈을 쥐어 주었다. 프랑스혁명과 그 후의 공포정치로 인하여 훔멜의 프랑스 및 스페인 순회연주는 취소될 수밖에 없었다. 비엔나에 돌아온 훔멜은 당대의 알브레헤트버거(Albrechtsberger), 하이든, 살리에리로부터 레슨을 받았다.

 

그때쯤하여 청년 베토벤이 비엔나에 왔다. 베토벤은 훔멜보다 8살 위였다. 베토벤도 알브레헤트버거와 하이든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그로부터 훔멜과 베토벤은 동문으로서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간혹 의견이 달라 격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평생 친구였다. 베토벤이 병마와 싸우며 생의 마지막을 기다리고 있는 시기에 훔멜은 자기 부인 엘리자베트, 제자인 페르디난트 힐러(Ferdinand Hiller)와 함께 과일을 사들고 베토벤을 자주 찾아가 병문안을 했다. 베토벤은 훔멜에게 자기가 죽은 후에 미발표된 작품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훔멜은 베토벤의 희망에 따라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후 이 위대한 인물을 추모하는 기념음악회를 주선하였다. 이 음악회를 통하여 슈베르트와 훔멜은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도 베토벤이 서거한지 1년후에 세상을 떠났다. 훔멜을 존경한 슈베르트는 마지막 3곡의 피아노 소나타를 훔멜에게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 소나타들이 출판될 당시에는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났으므로 출판업자는 이를 슈베르트가 로베르트 슈만에게 헌정하는 것으로 하여 초판을 출판했다. 슈만은 당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로서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작품을 헌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1804년 훔멜은 하이든의 뒤를 이어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하이든이 양로원에서도 환영하지 않을 정도로 연로하여 에스터하지 궁전에서의 직분을 감당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훔멜은 7년동안 이곳에 머물렀으나 하이든처럼 성실하지는 못해서인지 아무튼 책임과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로 파면되었다. 기왕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훔멜은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였다. 그 때 소프라노로서 오페라에 자주 출연했던 엘리자베트 뢰켈(Elisabeth Röckel)을 만났고 만난 김에 결혼했다. 훔멜은 후에 슈투트가르트와 봐이마르의 음악감독에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괴테, 쉴러와 친밀하게 지냈다. 훔멜은 봐이마르에 머무는 동안 이 도시를 유럽 제1의 음악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훔멜은 정상급 음악인을 자주 초청하였다. 훔멜은 또한 봐이마르의 동료 음악가들을 위한 연금제도를 만들었다. 연금의 재원이 부족하면 특별 연주회를 열어 기금을 충당했다. 훔멜은 음악의 지적재산권과 저작권 옹호를 위해 처음으로 투쟁한 음악인이었다. 모차르트가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저작권이 보호받지 못해서라는 얘기가 있다. 훔멜이 더 일찍 사회에 등장해서 음악가 연금제도를 만들고 저작권 보호 운동을 했다면 모차르트의 생명도 연장되었을 것이고 베토벤의 청각장애도 고쳤을 것이다. 훔멜은 1828년 ‘피아노연주예술에 대한 이론 및 실제 완전정복’(A Complete Theoretical and Practical Course of Instruction on the Art of Playing the Piano Forte)라는 책을 썼다. 책이 나오자마자 며칠만에 수천권이 팔리는 인기를 끌었다. 운지법과 장식적 연주에 대한 새로운 스타일을 설명한 책이었다. 19세기 후반의 피아니스트들은 거의 모두 훔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칼 체르니(Carl Czerny)는 원래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어느날 밤 훔멜의 연주를 보고 훔멜에게 배우기로 결심했다.

 

생의 말년에 이른 훔멜은 수많은 젊은 작곡가들의 등장을 보고 작곡에서 손을 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훔멜은 많은 존경을 받았다. 훔멜은 봐이마르에서 조용하게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프리메이슨이었던 훔멜은 그의 저택에 붙어있는 넓은 땅을 프리메이슨을 위해 유산으로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훔멜의 죽음을 애도했고 사후에도 상당기간 그의 작품을 소개하는 연주회가 열렸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훔멜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고전을 낡은 패션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었다. 훔멜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이라는 거목의 그늘에 가려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서 위대한 훔멜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훔멜은 10편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몇편은 미완성이었으며 완성된 것도 어떤 것은 악보를 찾을 수 없어 어떤 오페라였는지 알 수 없다.

 

그는 근대적인 주법으로 피아노 음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 연주는 아름다운 음형적인 장식으로 인하여 극히 아름답고 부드럽다. 그의 피아노 음악의 양식은 쇼팽, 슈만, 리스트 등에게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 훔멜(Hummel)의 피아노 작품은 125곡을 상회하는데 7곡의 피아노 협주곡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또한 그의 피아노 독주곡 "론도 파보리 (Rondo favori in Eb, Op.11)"는 지금도 즐겨 연주되고 있는 명곡이다. 그의 작품중 비교적 잘 알려진 "트럼펫 협주곡 Fb장조" 외에도 "바순 협주곡"이 있으며 사랑받던 실내악으로 "피아노 5중주"도 있는데 실내악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Link / Johann Nepomuk Hummel (Composers)

Johann Nepomuk Hummel (Mozart Forum)

Johann Nepomuk Hummel (Michael Haydn - Contemporary composers)

 

훔멜 - 피아노 3중주 7번, Op.96

 

훔멜 - 트럼펫 협주곡 / Timofei Dokshitser

훔멜 - 트럼펫 협주곡 1악장-윈튼 마샬리스

훔멜 - 트럼펫 협주곡 2악장-윈튼 마샬리스

훔멜 - 트럼펫 협주곡 3악장-윈튼 마샬리스

훔멜 - 바순 협주곡 F장조

훔멜 - 만도린 협주곡 G장조 Op.28

 

 

16. 파가니니 [1782.10.27~1840.5.27]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음량은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지만 음색은 매우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형식적인 면보다 즉흥적인 화려함에 특색이 있다. 자기의 연주법을 비밀에 붙이고 제자도 단 한 사람 시보리뿐이었으며, 유파(流派)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법은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원어명 Niccolò Paganini

국적 이탈리아

출생지 이탈리아 제노바

주요작품 협주곡 2곡, 카프리치오 24곡

 

제노바 출생. 어려서 제노바의 오페라극장 지휘자 세르베토와 산로렌초성당의 악장 G.코스타 등에게 사사하고 9세 때 첫 바이올린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13세 때 다시 A.롤라에게 바이올린을, 기레티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그는 그 무렵부터 연주여행과 초인적인 기교를 발휘하기 위한 난곡(難曲)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루카에서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둔 후 북부 이탈리아 각지를 돌며 화려한 연주생활에 들어갔으나 1801∼1804년 어느 귀부인과의 동거생활로 연주활동에서 떠나 어렸을 때 배운 기타에 열중하였다가 1805년 연주활동을 재개, 루카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그 곳 궁정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813년에는 밀라노에서 한 시즌에 36회나 연주회를 열고, 1815년에는 베네치아로 옮겨 그 곳의 여가수 안토니아 비안키를 만나 두 사람 사이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으나 그들은 2년 후에 헤어졌다.

 

이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졌으나 그의 명예욕과 활동력은 건강과는 반비례적으로 불타올라, 1823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이른바 파가니니선풍을 일으켰다. 이 선풍은 다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휩쓸고 1831년에는 파리, 이어서 런던을 비롯한 영국 각지에까지 미쳤다. 이 여행에서 파가니니는 거만의 부(富)와 연주사상 공전의 명성을 얻은 후 1832년 제노바로 돌아왔다. 그러나 1833년 파리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한 후부터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마침내 인후암(咽喉癌)으로 죽었다. 그는 자기의 연주법을 비밀에 붙이고 제자도 단 한 사람 시보리뿐이었으며, 많은 명바이올린 연주자들처럼 유파(流派)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법은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그의 음량은 그다지 풍부하지 않았지만 음색은 매우 아름다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 각종의 중음(重音), 플라지올레토, 스타카토, 스피카토, 살타토 등의 기교를 극도로 구사하여 화려한 곡예적인 연주법를 창조하였다. 그것은 당시 급격히 무르익어 가고 있던 낭만파음악의 일대 특징인 명인적(名人的)인 연주의 선구를 이루는 것으로, 그의 주법은 직접 후세에 전달되지는 못했으나 낭만파음악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작품은 바이올린곡뿐이며, 모두가 어려운 기교를 곁들인 것으로 형식적인 면보다 즉흥적인 화려함에 특색이 있다. 대표작에 협주곡 2곡(미출판분은 제외), 카프리치오 24곡이 있다.

 

 

17. 베버 (Karl Maria Friedrich Ernst von Weber 1786∼1826)

   

독일 작곡가. 오이틴(지금의 올덴부르크) 출생. 극장의 무대감독과 악장을 겸하고 있었던 프란츠 안톤과 그의 후처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이듬해에 아버지가 순회극단을 조직하여 각지를 순회했기 때문에 정규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6세부터 무대에 서게 되어 일찍부터 극장일을 익혔던 것이 훗날 오페라작곡가·지휘자로 활동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 W.A. 모차르트와 친척관계(아버지의 형이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아버지)였고 또 아들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우려는 아버지는 음악교육에 주력하였다. 1798년에 잘츠부르크에서 J.M. 하이든(F.J. 하이든의 동생)에게 사사하여 습작 《6개의 푸게타》가 작품1로 출판되었다. 이해에 최초의 오페라 《사랑과 술의 힘》을 시도하였고, 이어서 《숲속의 처녀(1800)》 《페터 시몰과 이웃들(1801)》을 작곡하여 상연되었다. 1803년 빈에서 작곡가 G.J. 포글러에게 사사하였고 이듬해에 포글러의 천거로 브레슬라우오페라극장의 악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젊은 악장의 정력적인 활동이 주위의 반감을 사게 되어 《뤼베찰(1805)》은 상연되지 못하였다. 1806년 카를스루에의 오이겐공(公)의 악장으로 있으면서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하여 호평을 받았다. 1807년에 슈투트가르트의 루트비히공의 비서 겸 음악교사가 되었으나 공의 방탕한 생활에 휘말려 음악생활은 정체되었고 1810년에는 공금형령 혐의로 추방처분을 받았다. 이 불명예스러운 사건을 깊이 반성한 그는 만하임으로 옮기고 연주여행을 하며 《질바나(1810)》 《아부하산(1811)》을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13년 프라하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으나 창작할 시간이 적어 사직하고 1817년 드레스덴궁정오페라극장의 악장으로 취임하였고 가수 카롤리네 브란트와 결혼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세력에 대항하여 독일어 오페라 상연에 힘쓰면서 오랫동안 구상해 왔던 《마탄(魔彈)의 사수》의 작곡에 몰두하여 1820년에 완성하고, 1821년 6월에 베를린에서 초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823년 빈에서 초연한 《오이뤼안테》는 대본이 약하여 실패로 끝나고 이때부터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생활도 궁하게 되었다. 1825년 런던의 코벤트가든극장의 의뢰로 《오베론》 작곡에 착수하였고, 1826년 런던에서 초연을 지휘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나 과로로 병이 악화되어 6월 5일 런던에서 죽었다. 베버는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겼으나 본질적으로는 오페라음악가였다. 오페라를 중심으로 낭만주의를 추진하고 《마탄의 사수》로 독일국민오페라를 확립하였다. 다른 오페라는 현재 거의 상연되지 않으나 독창적인 관현악법을 구사한 서곡은 널리 애호되고 있다. 피아노곡과 협주곡 등 많은 기악곡 중에는 《무도에의 권유(1819)》,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콘체르트슈튀크(1821)》가 낭만적 표제음악의 선구로 주목받고 있다.

 

 

18. 로시니 [Gioacchino Rossini, 1792.2.29~1868.11.13]

 

요약

이탈리아의 작곡가. 38곡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칸타타·피아노곡·관현악곡·가곡·실내악곡·성악곡 등 여러 방면을 많이 작곡했다.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이탈리아 고전오페라의 최후의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이탈리아 페자로

주요작품 《세비야의 이발사》《오셀로》《도둑까치》

 

본문

페자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음악가였던 부모님한테서 기악을 배우고 뒤에 교회의 성가대에서 활동하였다. 1804년 전 가족이 볼로냐로 이사하자, 그곳에서 종교음악의 작곡에 뛰어난 안토니오 테제이 밑에서 정식으로 작곡공부를 하고 1806년 볼로냐음악학교에 입학하여 다시 첼로·피아노·작곡 등을 배웠다.

 

재학 중에 발표한 칸타타 《오르페오의 죽음에 대한 아르모니아의 통곡》으로 상을 받고, 1810년 베네치아에서 공연한 《결혼 어음》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1813년에 상연한 《탕크레디》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자》가 모두 호평을 받고, 1816년 로마에서 공연한 《세비야의 이발사》가 절찬을 받아 이때부터 그는 일류의 작곡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어 《오셀로》(1816, 나폴리) 《도둑까치》(1817, 밀라노) 등도 절찬을 받았다.

 

그리고 1822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로시니 선풍을 일으켰으며, 1823년에는 런던을 방문, 영국왕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824년 파리로 건너가서는 이탈리아오페라극장의 감독을 맡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연금과 보수를 받고 작곡에 종사하였다. 그의 작품은 이밖에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815, 나폴리) 《신데렐라》(1817, 나폴리) 《이집트의 모세》(1818, 나폴리) 등과 파리에서의 작품 《오리백작》(1828) 《빌헬름 텔》(1829) 등이 있다.

 

1836년 볼로냐로 돌아와 음악학교 교장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848년 피렌체로 옮겨 잠시 지낸 후 1855년 다시 파리로 건너가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한편 만년에는 요리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저서를 내기도 하였다. 38곡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칸타타·피아노곡·관현악곡·가곡·실내악곡(현악4중주곡 등)·성악곡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작곡을 한 그는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이탈리아 고전오페라의 최후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졌다.

 

 

19. 도니체티[Domenico Gaetano Maria Donizetti](1797-1848)

 

1797. 11. 29 알프스 남부 치살핀 공화국 베르가모~1848. 4. 8 베르가모(죽을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하나인 롬바르디아 공국에 속함).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도니체티-〈사랑의 묘약〉 중

그가 작곡한 많은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오페라는 로시니와 베르디를 연결하는 오페라의 발전에 다리를 놓았다. 작품들 중 특히 〈람메르무어의 루차 Lucia di Lammermoor〉(1835)·〈연대의 딸 La fille du régiment〉(1840)·〈라 파보리테 La favorite〉(1840) 등이 유명하다. 그의 오페라세리아(:비극적 혹은 기타 진지한 주제에 의한 이탈리아 정통 오페라)에는 독특한 극적 중량감과 감정적 내용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희가극에서도 특유의 재치와 명랑함이 돋보인다.

 

[초기생애]

시(市) 전당포 관리인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나 바이에른의 신부 요한네스 지몬 마이어(베르가모의 주요한 성당인 산타마리아 마지오레의 음악감독이자 성공적인 오페라 작곡가)에게 음악을 처음 배웠다. 합창단원으로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그의 잠재된 음악 재능을 높이 산 마이어 신부가 그를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르모니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이곳에서 푸가와 대위법을 철저히 공부했으며, 아버지의 소원대로 교회음악 작곡가가 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양의 종교음악을 작곡해보기도 했지만 천성은 오페라 등 극음악에 적합했다.

 

 

최초의 성공작은 〈보르고냐의 엔리코 Enrico di Borgogna〉로 1818년 베네치아의 테아트로 산 루카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이후 12년 동안 작곡한 31개가 넘는 오페라들은 대부분 나폴리에서 공연되었는데 현재 거의 공연되지 않는 상태이다. 1830년 〈안나 볼레나 Anna Bolena〉를 밀라노에서 공연함으로써 전 유럽 도시와 이후 대서양을 넘어 미국에까지 그의 명성을 떨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년 후 그는 당시 최대의 극작가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에 의한 매력적인 희가극 〈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으로 또한번 대성공을 거두었다. 역시 로마니가 대본을 쓴 〈루크레차 보르자 Lucrezia Borgia〉(1833)가 또다시 성공하면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가극장 등 이탈리아 여러 곳에서 명성을 굳혔다. 오페라 작곡가 로시니와 벨리니가 그보다 먼저 파리로 간 것처럼 그 역시 이탈리아에서 성공한 후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공연한 〈마리노 팔리에로 Marino Faliero〉는 실패작은 아니었지만 몇 주 전에 발표된 벨리니의 〈청교도 I Puritani〉로 인해 그늘에 가린 감이 없지 않다. 이후 그는 뛰어난 비극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차〉(1835. 9. 26)를 작곡하기 위해 나폴리로 돌아갔다.

 

 

1828년 로마의 한 친한 친구의 누이 비르지니아 바셀리와 결혼했고, 나폴리에서 가정을 꾸몄다. 1837년 그녀가 아들을 사산하고 죽자 아내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평생 동안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명의 자식이 태어났으나 1명도 살아 남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가족들의 사인은 매독이었는데, 이 병은 훗날 도니체티에게도 죽음을 가져다주었다.

 

[파리에서의 성공]

도니체티는 나폴리에서 계속 작품활동을 하다가 1838년 시 검열관들이 〈폴리우토 Poliuto〉의 공연을 금지하자(그리스도교 순교를 다룬 이 작품은 종교적 주제가 공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음) 다시 파리로 갔다. 파리는 벨리니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로시니가 은퇴한 후였기 때문에, 도니체티에게 있어 좀더 활동하기 쉬운 무대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몇 가지 성공작을 재공연했지만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 바탕을 둔 오페라 〈루크레차 보르자〉는 위고의 반대로 공연되지 못했다. 〈폴리우토〉는 외젠 스크리브의 프랑스 대본으로 〈순교자 Les Martyrs〉라는 제목으로 공연되었고, 이보다 2개월 앞서 오페라 코미크〈연대의 딸〉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의 인기는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예뉘 린드, 아델리나 파티, 마르첼라 젬브리히, 엠마 알바니 등 당시의 뛰어난 소프라노 가수들이 주역을 맡았다. 같은 해에 파리 오페라 극장은 도니체티의 첫 그랑 오페라 〈라 파보리테〉를 공연했다.

 

 

〈마리아 파디야 Maria Padilla〉는 도니체티의 동료이자 제자였던 바르톨로메오 메렐리가 라 스칼라 가극장과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의 감독으로 일하면서 후원한 작품이며, 1841년 베르디의 〈나부코 Nabucco〉가 초연되기 불과 몇 주 전에 공연되었다. 역시 메렐리가 빈의 케른트네르토르 극장에서 공연할 생각으로 후원한 〈샤모니의 린다 Linda di Chamounix〉는 1842년에 공연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황후에게 헌정되었다. 이미 오스트리아 총리 메테르니히의 소개로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관심을 끌고 있던 상태였고, 로시니의 〈슬픈 성모 Stabat Mater〉를 황제 앞에서 지휘한 적도 있었던 도니체티는 이제 오스트리아의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이 자리에 있으면서 그는 1년 중 6개월을 빈에서 보내고 나머지 6개월은 자유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궁정작곡가로 임명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는 로시니로부터 볼로냐에 있는 리체오 필라모니코 음악원의 원장직을 의뢰받았으나,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해 자신이 좋아하는 오페라 창작작업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로시니는 파리에서 언제나 도니체티의 인기를 북돋워주었고, 볼로냐에서 자신이 작곡한 〈슬픈 성모〉를 초연하도록 했다. 도니체티는 파리로 돌아와 테아트르 이탈리앵 극장에서 흥겹고 재치넘치는 희가극 〈돈 파스콸레 Don Pasquale〉를 공연했다.

 

[신체의 쇠약]

그러나 도니체티는 이미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있었다. 1843년에 스크리브의 대본으로 만든 최후의 걸작 오페라인 〈동 세바스티앙 Dom Sébastien〉이 파리 오페라단에서 공연되던 당시에 이미 만성 두통과 이따금의 정신발작증으로 시달리던 상태였다. 그는 갑자기 늙어갔고 빼어난 용모와 마음의 평정도 잃었다. 〈동 세바스티앙〉은 신문에 의해 시시한 작품으로 평가되었지만 실제로 오페라 청중에겐 성공적인 호응을 얻었다.

   

나머지 생애 동안 그는 절망적인 정신착란의 늪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그는 파리 근처의 개인 정신병원에 환자로 입원해 있으면서, 프랑스 경찰과 의사들을 애먹였다. 결국 그의 조카 안드레아(맏형의 아들)가 그를 고향 베르가모로 데려왔고, 그곳에서 삶을 연명하다가 1848년 4월 8일 죽었다. 그는 의지력·언어능력·신체조절능력이 상실된 채 대개의 매독환자처럼 정신발작 후유증의 제물이 되었다. 벨리니와는 달리 다른 작곡가들의 성공을 시기하는 법이 없이 언제나 넓은 아량을 지녔던 명랑하고 잘생긴 그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최후였다. 그는 프랑스의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가 〈주르날 데 데바 Le Journal des Débats〉지에 자신의 음악에 대해 혹독한 평론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빈으로 떠난다고 하자 아주 기꺼이 총리 메테르니히 앞으로 소개장을 써줄 정도로 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

   

도니체티는 언제나 평론가들보다는 청중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평생 동안 그가 거둔 성공은 대단한 것이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을 받았다. 도니체티의 인기는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1914년경부터 베르디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걸작들의 빛에 가려져 그의 오페라는 연주 레퍼토리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 와서 도니체티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게 되었고, 이후 〈람메르무어의 루차〉·〈사랑의 묘약〉·〈돈 파스콸레〉와 같은 몇몇 오페라는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의 사랑을 널리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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