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노래의 날개 위에(감상,기악)

3-4) 초기 낭만주의

우렁터 2013. 1. 27. 14:42

4) 초기 낭만주의

 

20. 슈베르트 [1797.1.31~1828.11.19]

 

요약

오스트리아의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로 '가곡의 왕'으로 불린다. 주로 빈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부문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겼고 가곡을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끌어올렸으며 다양한 가곡형식으로 독일가곡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요작품에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나그네》 등이 있다.

 

원어명 Franz Peter Schubert

별칭 가곡의 왕

국적 오스트리아

활동분야 음악

출생지 오스트리아 리히텐탈(빈)

주요작품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겨울나그네》 《죽음과 소녀》

 

본문

리히텐탈(빈)출생. 초기 독일낭만파의 대표적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고 있다. 아버지는 빈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를 경영하고, 어머니는 장인(匠人)의 딸이었다. 그의 음악적 천분은 일찍부터 두드러져 8세 때 교회의 합창지도자들로부터 가창·바이올린·피아노·오르간 등의 기초적인 지도를 받고 11세 때 아름다운 소년 소프라노 음성을 인정받아 빈 궁정예배당의 합창아동으로 채용되어 국립 기숙신학교(寄宿神學校)에 들어갔다. 여기서 궁정 오르간 주자 루치카, 궁정악장 A.살리에리에게 작곡법을 배워 작곡을 시작하였으며 16세 때 1년 과정의 교원양성학교에 다닌 후 아버지가 경영하는 학교의 저학년 수업을 담임하기도 하였다.

 

1814년 《실을 잣는 그레트헨:Gretchen am Spinnarde》(작품 2 ·D. 118)을 비롯하여 많은 가곡과 3곡의 현악4중주곡 등을 작곡하였다. 1815년에는 《들장미:Heidenrö slein》(작품 3-3·D. 257), 《마왕 Erlkö nig》(작품 1·D. 328)을 비롯한 약 145곡의 가곡과 2곡의 교향곡, 그리고 이 밖에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그의 작품은 극히 일부 친구들 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이 지니는 매력에 끌려 친구가 된 사람도 많았다. 1816년 초등학교 교사직에 압박감을 느낀 그는 빈자리가 생긴 라이바하의 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로 취직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또 이 해에 친구 슈파운의 권고로 바이마르에 사는 괴테에게 이제까지 괴테의 시를 가사로 작곡한 가곡을 몇 작품 골라 보냈으나 괴테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악보는 반환되고 말았다.

 

슈베르트를 세상에 알리려고 애쓴 그의 친구들은 다시 제2의 가곡집을 모아 괴테에게 보내려고 계획하였으나 그것은 그의 악보가 출판된 후 5년이 지날 때까지 실현되지 못하였다. b장조(D. 485), 그리고 가곡 《마부 크로노스에게》(D. 369), 《자장가》(D. 498), 《방랑자:Der Wanderer》(D. 489) 등이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1816년 말경부터 그는 교직을 떠나 친구 쇼버와 같이 살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는데, 이듬해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무렵 쇼버의 소개로 유명한 성악가 J.M.포글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세상에 인정케 한 최초의 가수이다.

 

1818년 여름 헝가리의 P.A.에스테르하지 백작집의 하계(夏季) 음악교사로 초빙된 것을 기회로 그는 집에서 나와 그 후로는 빈 시내의 친구들을 찾아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보헤미안생활을 보내면서 작곡을 계속하였다. 1824년 여름 다시 에스테르하지 백작집의 가정교사로 초빙을 받았는데, 슈베르트는 그 후로는 공직을 맡은 적이 없었으며, 아내도 가정도 없이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전년에 작고한 벨링크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무덤 가까이 묻혔으며, 88년 두 묘는 빈의 지멜링크 중앙묘지로 옮겨졌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깊이 존경하였고, 또 평생의 대부분을 빈에서 보냈으며 그 곳에서 음악활동을 하였으므로 베토벤과 비교해 보면 슈베르트의 작풍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베토벤은 음악을 계시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민(選民)으로 자처하였다. 이것은 당시 독일 유식계급의 눈에 비친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 초기 활동의 지도이념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이와 같은 선민의식을 갖지 않았고, 스스로 즐기며 타인도 즐겁게 하려고 작곡을 하였다. 이 즐거움은 메테르니히의 보수정책에 의하여 언동에 제약을 받아 현실에서 눈을 돌려 예술에서 도피장소를 찾으려는 오스트리아의 유식계급과, 거기에 안주하려는 서민계급의 즐거움으로 다분히 감상성(感傷性)·안이성·비논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슈베르트음악의 특징의 하나인 비구축성(非構築性)이 유래된다. 그의 교향곡·실내악·피아노소나타 등이 형식적으로는 소나타이기는 하나 실제는 아름다운 선율의 연계로 되어 있음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그 이전의 빈고전파의 작곡가들과 같이 오페라·실내악·피아노곡·교회음악·가곡 등, 협주곡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 걸쳐 있고 작품량은 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극히 많은 셈이다. 오토 에리히 도이츠의 연대순(年代順)으로 정리된 작품번호(D.로 약기)에 따르면, 작품수는 998개에 이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약 633곡의 가곡이며, 이전의 고전파시대에는 별로 주목되지 않았던 가곡이라는 예술부문이 슈베르트에 의하여 아름다운 선율과 색채에 넘치는 화성(和聲)에 힘입어 비로소 독립된 주요한 음악의 한 부문으로 취급된 점이다.

 

1814년의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이 새로운 가곡양식의 제1보가 되는데, 이것은 변주유절가곡(變奏有節歌曲)의 형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의 가곡형식은 그 밖에도 다양하여 《들장미》와 같은 엄격한 유절가곡(有節歌曲), 자유스러운 보통가곡, 낭창(朗唱)양식을 갖는 것들이 있으며, 이 다양한 가곡형식은 그 후의 R.A.슈만, F.리스트로부터 R.슈트라우스에 이르는 독일가곡의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는 교향곡을 비롯한 기악곡분야에서도 풍부한 선율과 아름다운 화음에 의하여 고전적인 단정함과 낭만적인 서정성이 감도는 많은 작품을 창출(創出)하였다.

 

W.뮐러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처녀 Die schö ne Müllerin》(작품 25·D. 795·1823·전20곡), 《겨울나그네 Die Winterreise》(작품 89·D. 911·1827·전24곡), 교향곡으로는 《미완성교향곡》 B단조 제8번(D. 759·1823), 《교향곡 제9번》 C장조 (D. 944·1828:종래에는 제7, 또는 제10이라고도 하였음), 실내악으로는 현악4중주곡 D단조 《죽음과 소녀》(D. 810·1824), 피아노5중주곡 A장조 《송어 Die Forelle》(D. 667·1819), 피아노곡으로는 8곡의 《즉흥곡 Impromptus》, 6곡의 《악흥(樂興)의 때 Moments Musicaux》 등이 있다.

 

 

21. 벨리니[Vincenzo Bellini](1801-1835)

 

1801. 11. 3 시칠리아 카타니아~1835. 9. 23 프랑스 파리 근처 퓌토.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감각적 표현력이 강한 독자적인 양식의 성악 선율을 만드는 데에 천부적 재능을 지녔다. 그는 바그너의 초기 작품을 포함한 그 이후의 오페라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쇼팽과 리스트 같은 기악음악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난 벨리니는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가 입학시킨 나폴리 음악원에 재학중 첫번째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후 벨리니는 영향력있는 오페라 흥행주의 후원을 얻어 그의 의뢰로 나폴리 오페라를 위해 〈비안카와 페르난도 Bianca e Fernando〉를 작곡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다른 작품들을 의뢰받았는데 특히 밀라노에 있는 라 스칼라 극장을 위해 작곡한 〈해적 Il pirata〉(1827)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희극 작가인 펠리체 로마니를 대본작가로 쓰는 행운도 안았는데 이후 여섯 작품을 로마니와 공동으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을 개작한 〈카풀레티가와 몬테키 I Capuleti ed i Montecchi〉(1830)와 〈몽유병 여인 La sonnambula〉(1831)·〈노르마 Norma〉(1831)가 있다. '오페라 세미세리아'(심각한 내용이지만 행복하게 끝나는 오페라)에 속하는 〈몽유병 여인〉은 영국에서까지 큰 인기를 얻어 영어로 번역되어 공연되기도 했다. 고대의 갈리아 지방을 무대로 한 대표작 〈노르마〉는 초연이 실패했는데도 지속적인 성공을 누리고 있는 작품이다. 1833년 런던에 잠시 머물렀던 벨리니는 파리로 가서 로시니의 영향을 받아 테아트르 이탈리엔 극장에서 오페라를 의뢰받고 〈청교도 I puritani di Scozia〉(1835)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부적절한 대본이 약점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 중 가장 야심적이고 아름다운 오페라이다. 벨리니의 명성은 전적으로 당대 명가수들의 벨칸토 창법에 의존한 것이었다. 개혁가가 아니었던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이상과 동일했고 명료성, 형식과 멜로디의 우아함, 가사와 음악의 밀착된 결합을 추구했으며 인내를 가지고 당시 오페라의 폐단을 고쳐나갔다. 관현악단의 반주보다 가수의 노래를 더 중시해 가수의 목소리를 극적 표현의 주된 수단으로 삼았으나, 그의 화성은 동시대인이었던 도니체티에 비한다면 매우 획기적이었으며 서주와 간주에서 관현악의 처리는 형식적인 겉치레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벨리니를 영원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성악 선율의 독자적인 매력과 우아함에 있다.

 

 

22. 베를리오즈 [Louis-Hector Berlioz, 1803.12.11~1869.3.8]

 

요약

프랑스의 작곡가. 프랑스의 유일한 교향곡 작곡가였고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극적인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의 새로운 '관현악법'은 이후의 많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음악

출생지 프랑스 라코트생앙드레

주요저서 《근대의 악기법과 관현악법》(1844), 《회상록》

주요작품 《테 데움》《환상교향곡》(1830), 《이탈리아의 해럴드》(1834), 《레퀴엠 Requiem》(1837), 《벤베누토첼리니》(1838)

 

본문

남프랑스의 라코트생앙드레 출생. 17세 때까지 가정에서 일반교육을 받고, 그 후 파리에서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혹되어 작곡가가 되고자, 르쉬외르에게 사사하였다. 1826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작곡법과 푸가를 공부하고 1830년 로마상 콩쿠르의 대상으로 로마에 유학하였다. 그사이 파리를 방문한 영국 셰익스피어극단의 여배우 해리엇 스미스슨을 짝사랑하여 《환상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1830)을 작곡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고, 리스트, 쇼팽, 힐러, 넬바르, 뒤마(父) 등과 교유하는 한편, 1834년부터는 자작의 연주회와 작곡 등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시기의 작품에는 독주 비올라에 이탈리아의 추억을 상기시킨 교향곡 《이탈리아의 해럴드 Harold en Italie》(1834), 《레퀴엠 Requiem》(1837), 오페라 《벤베누토첼리니 Benvenuto Cellini》(1838), 그리고 독창과 합창이 곁든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엣 Roméo et Juliette》(1839) 등이 있다.

 

그러나 1838년 《벤베누토첼리니》의 상연 실패로 후반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게 되었다. 파리에서 자작의 활동무대를 잃은 그는, 1842년부터 국외로 나가 연주여행을 하게 되었다. 곧 1842∼1843년에는 독일 각지에서 연주를 하면서, 서곡 《로마의 사육제 Le Carnaval romain》(1843)를 작곡하였으며, 《근대의 악기법과 관현악법》(1844)이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다가 1845∼1846년의 프라하·부다페스트에서의 연주여행이 성공하자, 이에 힘입어 귀국 후 《파우스트의 겁벌(劫罰) La Damnation de Faust》(1846)을 완성, 초연하였으나 이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1847년 러시아와 영국에서 장기 체류할 예정으로 건너갔으나 이듬해 일어난 프랑스혁명(2월혁명)이 걱정되어 귀국하였으며 그의 《회상록》은 이 무렵 영국에서 착수되었다.

 

1850년에는 '필하모닉협회'를 결성하여 혁명 후의 파리에서 적극적인 연주활동을 추진하였지만, 이 역시 이듬해에 좌절되어 다시 국외 연주여행을 떠났다. 1854년 3부작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L'Enfance du Christ》이 비로소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고, 이듬해 1849년에는 완성 이후 연주장소를 얻지 못하였던 대작 《테 데움 Te Deum》이 만국박람회 개막을 축하하여 연주되었으며, 1856년에는 프랑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됨으로써 마침내 그는 생활의 안정을 얻었다.

 

만년에는 2부작 오페라 《트로이 사람 Les Troyens》의 작곡에 열중하였으나, 이 작품을 상연할 기회는 좀처럼 얻을 수 없었으며, 1863년 제2부 《카르타고의 트로이 사람 Les Troyens a Carthage》만이 상연되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희극 《베아트리스와 베네딕트 Béatrice et Bénédict》(1862)가 있다. 다년간에 걸친 연주여행은 1867∼1868년의 러시아 연주회를 끝으로 종지부를 찍고, 지병의 악화로 1869년 3월 8일 파리에서 고뇌에 찬 일생을 마쳤다.

 

베를리오즈가 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유일한 교향곡 작곡가이었으며 '표제음악'이라는 새로운 극적인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한 데 있다. 그리고 이 음악과 더불어 그의 새로운 '관현악법'은 이후의 많은 작곡가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문장에도 뛰어나 바그너와 더불어 명문가로 명성이 높으며, 자서전 《회상록》은 음악가가 쓴 전기문학 분야에서 걸작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23. 슈트라우스 [Johann Baptist Strauss, 1804.3.14~1849.9.25]

 

요약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며 바이올린 연주자로 '왈츠의 아버지'라 불린다. 자작의 무도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유럽 각지에서 연주, 이른바 빈왈츠를 전 유럽에 알렸으며 빈의 궁정무도회 지휘자를 맡았다.

 

출생지 오스트리아 빈

 

본문

빈 출생. '왈츠의 아버지'로 불리며,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는 그의 아들이다.

 

맥주홀과 여관을 경영하는 집안에 태어나 제본사에서 일하면서 바이올린을 익혔다.

 

1823년 J.F.라너의 4중주악단에 들어가 주로 비올라로 왈츠·카드리유 등의 무도곡을 연주하였는데, 이 악단은 1824년 현악오케스트라로 발족하여 슈트라우스는 그 제2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리고 1825년에는 자신의 악단을 조직하여 자작의 무도곡을 주요 레퍼토리로 유럽 각지에서 연주, 이른바 빈왈츠를 전 유럽에 널리 전파하였으며, 1845년에는 빈의 궁정무도회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작품은 왈츠, 카드리유 등의 무도곡이 대부분이며, 그 중에서도 왈츠에서는 서주(序奏)에 이어 5부의 왈츠를 계속하고 코다(coda:結尾)로 끝을 맺는, 리듬에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빈왈츠의 형식을 확립하였다.

 

  

24. 글린카 [Mikhail Ivanovich Glinka, 1804.6.1~1857.2.15]

 

요약

러시아의 작곡가. 오페라 《이반 수사닌》등을 작곡해 러시아의 첫 작곡가,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양식을 결정하는 데 그 영향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며,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도 이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별칭 러시아음악의 아버지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러시아 스몰렌스크주

주요작품 《이반 수사닌》(1836)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

 

본문

1804년 스몰렌스크주에서 출생하였다. 대지주의 아들로 페테르부르크에서 F.필드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나, 음악가가 될 마음이 없어 처음에는 교통성의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26세 때 건강문제로 이탈리아와 독일로 여행을 떠나, 이 여행 중 베를린에 머문 것이 그의 생애를 결정지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화성과 작곡을 S.W.덴에게 배우고,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개시하였다.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와서는 푸슈킨, 주코프스키 등 문학서클의 사람들과 사귀었으며, 그들의 자극으로 오페라 《이반 수사닌》(1836)을 썼는데, 이것이 러시아음악의 시작이 되었다. 그 후 오페라 《루슬란과 류드밀라》(1842)를 비롯한 여러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1844년에 다시 외국여행을 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유럽 각지를 순방하였다. 그러는 동안 베를리오즈와 친교를 맺고, 에스파냐에서는 작곡을 위한 소재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는 러시아의 첫 작곡가, 러시아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이는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양식을 결정하는 데 어떠한 작곡가보다도 그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며, 차이코프스키나 러시아 국민악파의 음악도 이 기반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외의 작품으로 《호타 아라고네사에 의한 화려한 카프리치오소》(1845) 《카마린 스카야》(1848) 등의 관현악곡이 유명하다.

 

 

25.  멘델스존 [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2.3~1847.11.4]

 

요약

독일의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어 고금의 명곡과 신작을 소개하는 데 진력, 유럽 제1급의 악단으로 키웠다. 고전주의 낭만파 음악의 대작곡가라는 명성과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국적 독일

출생지 독일 함부르크주

주요작품 《한여름밤의 꿈》(서곡 1824, 기타 부분 1842) 《이탈리아교향곡》(1833) 《바이올린협주곡》(1844)

 

함부르크주 출생. 아버지는 유대계 은행가, 조부는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M.멘델스존이다. 교양 있는 어머니와 일생 동안 두터운 애정으로 지낸 누이 파니 등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11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사, 일찍부터 음악교육을 받아 여러 악기를 다루게 되었고 그림 ·어학에도 재능을 발휘하였다. 괴테와 절친한 보수적 음악가 F.첼터의 지도도 받았다. 9세 때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고, 10세 때 작곡을 시작, 17세 때 관현악곡 《한 여름밤의 꿈》의 서곡을 쓰는 등 매우 조숙한 천재였다. 18세 무렵 베를린대학 청강생으로 헤겔의 미학 강의도 듣고 또 멘델스존가(家) 음악회에 모이는 베를린의 지식인들과도 교제하게 되었다.

 

1829년 베를린의 징 아카데미에서 J.S.바흐가 죽은 후 처음으로 그의 《마태오 수난곡》을 재연하였는데, 이것은 바흐 르네상스의 개막을 위한 19세기의 기념비적 연주로 높이 평가된다. 그 후 영국과 유럽 각지를 연주여행하였으며, 스코틀랜드에서의 경험이 명작 《핑갈의 동굴》(1830) 《이탈리아교향곡》(1833) 《스코틀랜드교향곡》(1842) 등을 낳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여행 중에 쇼팽, 리스트, 로시니, 베를리오즈 등 여러 작곡가들과 알게 되고 많은 악상(樂想)도 얻었다.

 

1833년 남(南)라인음악제를 지휘하고 뒤셀도르프시의 악단장, 18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어 고금의 명곡과 신작을 소개하는 데 진력, 유럽 제1급의 악단으로 키웠다. 1841년 프로이센왕(王)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명으로 베를린의 음악활동 향상을 위해 힘쓰고, 1843년 슈만과 함께 라이프치히음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의 일생은 짧았으나, 고전주의 낭만파 음악의 대작곡가라는 명성과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작품으로 관현악곡 《이탈리아교향곡》(1833) 《스코틀랜드교향곡》(1842), 서곡 《핑갈의 동굴》(1830), 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1844) 《카프리초 브릴란드》, 피아노곡집 《무언가(無言歌)》(48곡, 1829~1845) 《엄숙한 변주곡》(1841), 오르간곡 소나타 6곡, 전주곡과 푸카 3곡, 오라토리오 《성파울로》(1836) 《찬미의 노래》(1840) 《에리야》(1846) 등, 극음악(劇音樂) 《한 여름밤의 꿈》(서곡 1824, 기타 부분 1842) 《안티고네》(1840) 외에 합창곡 ·독창곡 등이 있다.

 

 

26. 쇼팽 [1810.3.1~1849.10.17]

 

요약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자유롭고 시대를 앞서나가는 독자적인 양식의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특히,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으로 유명하다. 페달의 사용과 약박(弱拍)을 약간 인접한 강박(强拍)에 접근시키는 연주법으로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원어명 Frédéric Fran??ois(Fryderyk Franciszek) Chopin

국적 폴란드

출생지 폴란드 바르샤바

주요작품 《빗방울전주곡》(1839) 《영웅폴로네즈》(1842)

 

본문

1810년 3월 1일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세례를 받은 날은 2월 22일로 기록되어 있어 실제 출생일은 7일이 앞선다. 아버지는 바르샤바 육군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친 프랑스인 니콜라스 쇼팽이고 어머니는 폴란드의 명문 귀족 출신인 유스티나 크지노프스카이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1816년 정식으로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피아노를 사사 받았는데, 1818년 공개 연주회에서 기로베츠의 협주곡을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스승 지브니는 쇼팽에게 더이상 가르칠게 없다면서 스스로 그만두었다.

 

1822년부터는 바르샤바음악원 창설자인 J.엘스너에게 화성법과 대위법을 배우고, 중학 재학 중에 러시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 칭송을 들었다. 또 시골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며 폴란드의 민속음악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1926년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소나타와 변주곡 등을 작곡하고, 또 이 무렵 J.N.후멜과 사귀게 됨으로써 창작하는 데 있어서 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830년 11월 쇼팽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있는데, 이때 폴란드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그후 그는 후멜, 탈베르크, K.체르니 같은 피아니스트와 교류를 가졌고, 1931년 9월 빈을 떠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하여, 러시아군에 의해 폴란드혁명이 진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던 쇼팽의 실망은 컸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 혁명 실패의 소식을 듣고 작곡한 것이 오늘날 《혁명 에튀드(작품 10의 12)》로 불리는 작품이다.

 

1831년 9월 중순 파리로 나온 쇼팽은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C.칼크브레너에게 피아노를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으나, 그의 개성이 상실될 것을 염려한 친구 F.리스트와 F.힐러의 만류로 이를 포기하고 말았다. 1832년 그는 파리에서의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고, 그뒤 폴란드 귀족의 소개로 파리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또 이 무렵부터 창작활동도 활발하였다.

 

1836년 드레스덴에서 바르샤바 시절의 여자친구인 M.보진스카를 다시 만났고, 이듬해에는 약혼으로까지 진전되었으나, 이때 쇼팽은 이미 폐결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의 반대도 많아 결국 파혼하게 되었다. 이무렵 마리 다구 백자부인이 주최한 파티에 참석하여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가 바로 여류문학가인 조르주 상드였다. 남성의 기능을 상실한 쇼팽보다 6세나 연상인 그녀는 쇼팽의 지병에 신경을 쓰며 모성애적 애정으로 그를 돌보아줌으로써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약 10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846년 가정불화와 쇼팽의 건강악화가 원인이 되어 두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그후 쇼팽의 건강상태는 악화일로를 거듭하였지만,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1848년 영국으로 건너가 연주회와 개인적 모임 등에서 피아노를 계속 연주하였다. 파리로 돌아온 후 그의 건강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개인교수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듬해 가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2주 후인 10월 30일에 거행되었는데, 그가 바르샤바를 떠날 때 선물로 받은 폴란드의 흙이 그의 유해 위에 뿌려졌다.

 

쇼팽의 작품에는 가곡과 첼로소나타, 피아노삼중주곡 등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약 200곡에 이르는 피아노곡이다. 그리고 협주곡 2곡, 소나타 3곡 이외에 전주곡·연습곡·발라드·야상곡·즉흥곡·왈츠·폴로네즈·마주르카 등의 낭만파적인 소품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이 특징이다. 작품에는 후멜과 J.필드의 영향이 다소 엿보이기는 하지만, 그의 양식은 거의 독립하여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다.

 

작품의 특징은 부드러운 선율에 의한 호모포니[單旋律]한 구성에 있으며, 선율의 움직임에 자유스러움을 주기 위하여, 반주 쪽을 화음적 패턴으로 함으로써 움직임을 억제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리듬이나 프레이징에서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자유로운 구조를 쓰고 있으며, 또 화음에서도 불협화음의 사용과 반음계적 취향을 구사함으로써 시대를 앞서가고 있다.

 

한편 마주르카 같은 민속음악의 형식을 쓴 것에서는 폴란드 민속음악에서 볼 수 있는 드로운 바스와 교회선법(敎會旋法)이 사용되고 있다. 피아노 연주에서는 쇼팽은 페달의 사용에 의해 음색의 종류를 늘렸으며, 또 약박(弱拍)을 악보에 기보(記譜)된 형보다도 약간 인접한 강박(强拍)에 접근시키는 연주법(tempo rubato:奏法)을 사용하여, 후세의 피아노 연주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

 

 

27. 슈만 [1810.6.8~1856.7.29]

 

요약

독일의 작곡가. 잡지 《음악신보》를 발행하여 작곡과 함께 평론활동을 하였으며 쇼팽과 브람스 등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낭만주의와 슈베르트의 영향을 받았고 피아노독주곡과 가곡 작곡에 특히 뛰어났으며 《피아노협주곡》, 《사육제》 등의 작품을 남겼다.

 

원어명 Robert Alexander Schumann

국적 독일

출생지 독일 작센 츠비카우

주요저서 《음악평론집》(1854)

주요작품 《피아노협주곡》(1845), 《사육제》(1835)

 

작센의 츠비카우 출생. 아버지는 저술도 하는 서적상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과 음악적 감성이 깊은 사람으로 슈만은 아버지의 문학적 취미와 어머니의 섬세한 감수성을 이어받았다. 11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였으나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음악가가 되려는 희망을 버리고 1828년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에서 당시의 명교사 F.비크를 알게 되어 그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또한 슈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풍기는 가곡과 피아노곡 등의 작곡도 시작하였다. 1829년 하이델베르크대학의 티보 교수에게 이끌려 잠시 그곳으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온 그는 다시 비크에게 피아노를, 극장 지휘자인 도른에게 음악이론을 배우고, 독학으로 작곡 연구도 하였다.

 

또 1831년경부터는 참신한 필치로 음악평론도 쓰기 시작하여 쇼팽 등의 새로운 음악가를 소개하였다. 1832년 오른손 넷째 손가락을 다치자 피아니스트가 될 꿈을 단념하고, 이때부터 작곡과 평론만을 지향하여 《나비》(작품 2, 1832)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에 의한 연습곡》(작품 3, 1832) 등의 피아노곡을 작곡하였으며, 34년에는 《사육제 Carnaval》(작품 9, 1835)와 《교향연습곡》(작품 13, 1834) 등을 내놓았다. 또 J.크노르, L.슝케, 비크 등과 함께 잡지 《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ür Musik》를 발행하여 낭만주의의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들의 음악적 주장은 주로 이 잡지를 통하여 이루어졌고, 1844년 드레스덴으로 떠날 때까지 많은 평론을 실었다. 1836년 어머니를 잃고, 스승 비크의 딸 클라라에 대한 친밀감은 더욱 강렬해져 연애에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이 사랑은 클라라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슈만은 이를 법정에 제소하여 1840년에 결국 결혼에 성공하였다. 그때까지 거의 피아노곡만 써 왔던 그는 이 해에 갑자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여 그의 생애를 통하여 작곡한 가곡의 반수를 이 1년 동안에 내놓았다. 하이네의 시에 의한 《가곡집》(작품 24)과 《미르테의 꽃》(작품 25), 아이헨도르프의 시에 의한 《가곡집 Liederkreis》(작품 39), 이 밖에 《여자의 사랑과 생애 Frauenliebe und leben》(작품 42) 《시인의 사랑 Dichter Liebe》(작품 48)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교향곡에 전념하여 제1번과 제4번의 2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다시 1842년에는 실내악으로 전향하여 3곡의 현악4중주곡 ·피아노4중주곡(작품 47), 피아노5중주곡(작품 44) 등의 고전적 폴리포니(polyphony:다성음악)와 낭만적인 서정이 곁든 중요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1843년 L.F.멘델스존의 초청을 받아 신설 음악원의 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4개월에 걸친 아내의 러시아 연주여행에 동행하여 정신과 육체적 건강의 악화로 전지 요양을 권유받았다. 1844년 라이프치히를 떠나 드레스덴에서 ‘리더 타펠’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1850년에는 힐러의 후임으로 뒤셀도르프의 오케스트라 및 합창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라인교향곡》으로 알려진 제3교향곡, 첼로협주곡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쓰여졌다. 평론으로는 마지막 것이 되지만, 1853년에 젊은 브람스를 소개한 《젊은 길》이 슈만의 명성을 남긴 논문이다. 그의 정신장애의 징후는 이미 1833년경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844년경부터는 창작력이 왕성한 시기와 우울증에 빠진 시기가 서로 교차되어 나타났으며, 1854년 2월 심한 망상에 사로잡혀 라인강에 투신했으나 다행히 구조되어 그 후부터 본 교외의 엔데니히정신병원에 수용되고, 1856년 여름 2년간의 투병 끝에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의 작품은 고전파 작곡가처럼 모든 분야에 걸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질적으로 가장 뛰어나고 작품수가 많은 것은 피아노독주곡과 가곡이다. 이 가운데 3곡의 피아노소나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시적 서정성이 담긴 낭만주의 향기가 풍기는 표제적(標題的)인 음악이다. 특히 가곡은 슈베르트가 개척한 리트형식을 계승하고 거기에다 시와 음악을 밀착시켜 보다 예술성이 높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주요작품 중 오페라에는 《Genovena》(1848), 교향곡으로는 《제1, 봄의 교향곡 Frühlingssymphonie》(1841) 《제3, 라인교향곡 Rheinishe Symphonie》(1850), 피아노곡으로는 《피아노협주곡》(1845) 《사육제》(1835) 《환상소곡집 Fantasiestücke》(1837) 《교향적 연습곡 Etudes symphonique》(1834, 개작 1852) 《어린이의 정경 Kinderszenen》(1838), 관현악이 딸린 대합창곡으로 《Paradies und die Peri》(1843), 가곡으로는 《유랑의 무리 Zigeunerleben》(1840) 《Myrthen》(1840) 등이 있으며, 주요저서로는 《음악평론집 Gesammelte Schriften über Musik und Musiker》(4권, 1854)과 서한집 《R.Schumanns Jugendbriefe》(188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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