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노래의 날개 위에(감상,기악)

3-5) 후기 낭만주의

우렁터 2013. 1. 27. 14:47

5) 후기 낭만주의

 

28. 리스트 [Franz von Liszt, 1811.10.22~1886.7.31]

 

요약

헝가리의 피아노 연주자 ·작곡가. 피아노 연주상의 명기주의의 완성과 표제음악의 확립이라는 음악사상 매우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작품은 편곡까지 포함해 방대한 수에 이르며 악종도 다양한데, 그 중심은 피아노곡과 교향시다.

 

국적 헝가리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헝가리 라이딩

주요작품 《헝가리광시곡》《순례의 해》

 

본문

라이딩 출생. 에스텔하지 후작의 토지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0년 프레스부르크에서 독주회를 가져 천재의 출현이라는 평을 받았다. 1823년 빈으로 가서 K.체르니에게 사사하면서 A.살리에리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다시 파리로 가서 파에르와 라이하로부터 화성(和聲)을 배웠다. 다음해 파리에서 데뷔한 후 프랑스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고, 런던에서도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827년 여행길에서 부친을 여의고 수년 동안은 고난의 시기였으나, 그 동안에 체험한 7월혁명(1830), 여제자 카롤린과의 사랑, 페티스, 쇼팽, 베를리오즈, 파가니니 등과의 교제는 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었다. 특히 파가니니와의 접촉으로 그의 연주는 종래 체르니의 스타일로부터 명기주의(名技主義)의 스타일로 전환하였다. 그 후 교향시 창조의 기반이 되는 문학적 교양을 쌓고, 6세 연상인 다구 백작부인도 이 무렵에 알게 되었다. 1835년 리스트와 부인은 제네바로 가서 동거생활에 들어가, 두 사람 사이에서 브랑딘, 코지마, 다니엘 등 세 아이가 태어났는데, 코지마는 후에 바그너의 부인이 되었다.

 

그는 1838년 빈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일대를 무대로 한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이것은 그가 바이마르에 정주(定住)한 1847년까지 계속되었다. 1847년 유럽 전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리스트는 바이마르에 정주하였고, 그것은 동시에 여행 중에 알게 된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과의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바이마르에서는 지휘자 ·작곡가 ·교육가 ·사회활동가로 폭넓게 활동하였으며, 지휘에서는 슈만 ·베를리오즈 ·바그너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창작면에서도 《3개의 연주회용 대연습곡》 《초절기교연습곡(超絶技巧練習曲)》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과 소나타 ·협주곡 등의 피아노곡, 《파우스트교향곡》 《단테교향곡》 《전주곡》 《타소》 《마제파》 《오르페우스》 《이상(理想)》 등의 교향시와 대표작을 연달아 내놓았다.

 

1861년 후작부인과의 결혼식 때문에 로마로 갔으나 부인 친척의 이의(異議)로 실패, 그 후 부인은 종교생활에 들어가고, 리스트도 수도원에 들어가서 평생 동안 흑의(黑衣)를 두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그의 작품에는 종교성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869년 로마에서 바이마르로 돌아와서는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리스트는 피아노 연주상의 명기주의의 완성과 표제음악의 확립이라는 음악사상 매우 중요한 공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은 편곡까지 포함하여 방대한 수에 이르며 악종도 다양한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헝가리광시곡》과 《순례의 해》를 포함한 피아노곡과 교향시이다.

 

   

29.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1813.5.22~1883.2.13]

 

요약

독일의 작곡가. 오페라 외에도 거대한 규모의 악극을 여러 편 남겼는데 모든 대본을 손수 썼고 많은 음악론과 예술론을 집필했다. 예술론의 사상이 전 작품에 걸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작품의 양식적 특색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작곡

출생지 독일 라이프치히

주요저서 《독일음악론》(1840) 《독일예술과 독일정치》(1868)

주요작품 《혼례》 《파르지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본문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8세 때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832년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첫 오페라 《혼례 Hochzeit》를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제2작인 《요정 Die Feen》을, 1836년에는 제3작인 《연애금제(戀愛禁制) Das Liebesverbot》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1836년 여배우 미나 플라너와 결혼하였으나 불행하게 끝났고, 1839년 《리엔치 Rienzi》를 작곡하던 중 러시아령(領)의 리가에서 파리로 갔으나 생활은 불우하였다. 그러다가 1842년 《리엔치》가 드레스덴오페라극장에서 상연된 것을 계기로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궁정 오페라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로부터 《방황하는 네덜란드 사람 Der Fliegende Holländer》을 직접 지휘하여 초연했고(1843), 다음 작품 《탄호이저 Tannhäuser》는 1845년에 상연되었다. 또,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으로 여겨지던 베토벤의 《제9교향곡》을 지휘하여 그 진가를 일반에게 알렸다.

 

1849년 드레스덴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바그너도 이에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령이 내렸다. 이를 미리 알고 피신하여, 리스트의 집에서 잠시 신세를 지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갔다. 여기에 머무는 동안 그를 돌봐준 베젠동크부인과의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을 《베젠동크가곡집》과 악극(樂劇)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에 담아 승화시켰다. 한편, 1850년에는 바이마르궁정극장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로엔그린 Lohengrin》이 상연되고, 1861년에는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 《바카날》을 작곡하였는데, 이 곡은 오페라극장에서 3회나 상연되었다. 또 같은 해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상연을 위해서 빈에 가기도 했으나 상연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1864년 봄, 추방이 해제되면서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으로 뮌헨에 정착하고 작곡에 몰두하였으나 그를 백안시하는 자가 많아 이듬해 1865년 스위스의 루체른 교외의 트리프셴으로 이사하였다. 그 해에 뮌헨에서 H.뷜로의 지휘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상연되어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또 1868년에도 역시 뷜로의 지휘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젱거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가 초연되었으며, 1870년에는 리스트의 딸이자 뷜로의 부인이었던 코지마와 재혼하였다(전처 미나는 1866년에 사망하였다). 이때 그에게는 이미 코지마와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1869년에 출생한 지크프리트는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되었다.

 

1870년 바그너는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여 《지크프리트의 목가 Siegfried Idyll》를 작곡하였다. 바그너는 자기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마침내 1876년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완성시켰다. 이 극장 개관기념으로 대규모의 악극 《니벨룽겐의 가락지 Der Ring des Nibelungen》 전곡을 상연하였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파르지팔 Parsifal》이 상연되었다. 이것이 상연된 후 요양차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갔으나, 1883년 2월 13일 벤다르민궁(宮)에서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바그너는 거대한 규모의 악극을 여러 편 남겼는데, 이 모든 악극의 대본을 손수 쓴 것은 아마도 그의 악극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또 많은 음악론도 집필했으며, 이에 따르면 그가 생각하고 있던 '전체예술(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를테면, 조형예술·시·음악 등)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예술이 모두 하나로 뭉쳐져 작품이 만들어져야 한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하여야 하고, 음악 스스로가 규정적(規定的)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와 같은 그의 예술론은 주로 《로엔그린》 이후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창작되기까지의 창작활동 중지기간에 씌어졌다. 이 예술론의 사상이 반드시 그의 전 작품에 걸쳐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작품 중의 다음과 같은 양식적 특색은 이 사상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겨난 것이다. ① 극의 전개와 심화에 관현악을 참가시키기 위하여 도입동기(導入動機)를 유효적절하게 썼다. ② 무한선율(無限旋律)이라고 그 스스로가 명명한 양식에 의하여 음의 흐름을 중단시키지 않고 극의 진전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③ 화성의 표현능력을 확대시켰다. 특히 대담한 반음계적 사용으로 음의 조성은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다. ④ 관현악 구성은 대규모화하여 표현의 폭의 넓이와 섬세함에는 종전의 낭만파음악에서는 볼 수 없었던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명문가로서 음악작품의 대본 이외에도 많은 예술론을 저술하여 《독일음악론 Über Deutsches Musikwesen》(1840) 《예술과 혁명 Die Kunst und die Revolution》(1849) 《미래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der Zukunft》(1850) 《오페라의 사명에 대하여 Über die Bestinnung der Oper》(1871) 《오페라와 희곡 Oper und Drama》(1851) 《독일예술과 독일정치 Deutsche Kunst und Deutsche Politik》(1868) 등의 저서를 남겼다.

 

 

30. 베르디 [Giuseppe (Fortunino Francesco) Verdi, 1813.10.10~1901.1.27]

 

요약

이탈리아의 작곡가. 그의 오페라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 위에서 극과 음악의 통일적 표현에 유의하면서도 독창의 가창성을 존중하고 중창의 충실화와 관현악을 연극에 참여시키는 문제 등에서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현 레론콜레

주요작품 《리골레토》(1851), 《라 트라비아타》(1853), 《아이다》(1871)

 

본문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현(縣)의 레론콜레에서 태어났다. 처음 마을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한테서 초보교육을 받고, 후에 부세트와 밀라노에서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였다.

 

1836년 부세트시절의 보호자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하고, 학업을 마친 후 잠시 부세트의 악우협회(樂友協會) 악장 노릇을 하다가 1839년 밀라노에 나와, 스칼라극장의 지배인 메렐리의 후원으로 오페라 《산 보니파치오의 백작(伯爵) 오베르토》를 상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 곧 두 아이와 아내를 잃고 또 희가극 《왕국의 하루》(1840)의 상연마저 실패하여 극도로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데 이때 메렐리와 가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나중에 그와 결혼) 등의 격려로 용기를 얻어 다시 활발한 작곡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쓴 것이 오페라 《나부코》이다. 이 작품은 1842년에 상연되었는데, 그 내용이 애국적이어서 당시 오스트리아의 압제하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 크게 어필하였다. 그후에도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1843), 《에르나니》(1844), 《아틸라》(1846), 《레냐노의 전쟁》(1849) 등 애국심이 넘치는 많은 작품을 썼다.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따 온 《맥베스》(1847), 실러의 《간계(好計)와 사랑》을 각색한 《루이자 밀러》(1849) 등으로 새로운 극적 경지를 개척해 나갔다. 그후 베르디는 밀라노를 비롯하여 베네치아·로마·파리·카이로 등지에서 잇달아 오페라 초연을 가졌다.

 

《리골레토》(1851),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1853), 《라 트라비아타 La Traviata》(1853),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1855), 《시몬 보카네그라》(1857), 《가면무도회》(1859), 《운명의 힘》(1862), 《돈 카를로스》(1867), 《아이다》(1871), 《오셀로》(1887), 《팔스타프》(1893) 등은 모두가 19세기 이탈리아오페라의 걸작으로서 높이 평가되며 오늘날까지 상연되고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19세기 전반까지의 이탈리아오페라의 전통 위에 서서, 극과 음악의 통일적 표현에 유의하고 있으면서도, 독창의 가창성을 존중하고 또 중창의 충실화와 관현악을 연극에 참여시키는 문제 등에서 남보다 한 걸음 앞서 있었다. 베르디의 오페라가 주로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은 그의 오페라의 힘차고 당당한 극적 성격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극적인 작품을 많이 썼던 말년에 《폴스타프》와 같은 희가극을 써낸 정력적인 창작력에 대해서는 우리는 그저 경탄할 따름이다. 오페라 이외의 작품으로는 《레퀴엠》, 현악사중주곡 등이 널리 알려졌다.

 

 

31. 구노 [1818.6.17~1893.10.18]

 

요약

프랑스의 작곡가. 프랑스음악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양식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전통을 계승했으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작품의 특징은 아름다운 선율에 있지만 지나치게 화사하거나 감상적이지 않으며, 알맞게 절제되고 조화도 잘 되어 있다.

 

원어명 Charles-Fran??ois Gounod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수상 로마대상(1839)

주요작품 《파우스트 Faust》(1859) 《아베 마리아》

 

본문

프랑스 파리 출생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836년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작곡 등을 공부하였다. 1839년에는 로마대상을 받아 이탈리아에 유학했다.

 

그후 독일을 거쳐 프랑스에 돌아온 후부터 극장음악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였으며, 몇 차례 실패작을 쓴 후 《벼락치기 의사》(1858)와 대표작 《파우스트 Faust》(1859)의 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유명해졌다. 그후 《로미오와 줄리엣》(1867) 등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오페라는 일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음악 분야에서 활약하였으며, 직접 합창단을 만들어 자작과 고전적 종교작품의 소개에 힘썼다.

 

그는 프랑스음악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양식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메율, 브와엘디외 등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스스로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작품의 특징은 아름다운 선율에 있지만, 같은 시대의 마이어베어처럼 지나치게 화사하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며, 알맞게 절제되고 조화도 잘 되어 있다. 작품은 오페라 이외에 오라토리오·칸타타 등의 종교작품과 《아베 마리아》 《세레나데》 등 가곡이 많은데, 특히 후자는 후일의 프랑스가곡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32.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1819-1880)

 

본명은 Jacob Offenbach.

1819. 6. 20 쾰른~1880. 10. 5 파리.

 

독일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

 

오펜바흐-오페레타 〈천국과 지옥〉 서곡

'오페레타'라는 경쾌하고 풍자적인 프랑스 희가극의 한 유형을 만들어냈는데 그 양식은 당시의 가장 독특한 예술적 산물 중 하나였다.

  

쾰른 예배당 칸토르인 아버지 이자크 유다 에베르스트의 아들로 오펜바흐암마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더 오펜바허'로 알려졌으며 그는 다만 '오펜바흐'로만 알려졌다. 유대교를 묵인하는 정책에 이끌린 그의 아버지는 젊었을 때 아들을 파리로 데려와서 1833년 파리 음악원 첼로과에 입학시켰다. 1844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스페인 카를로스주의자의 딸인 에르미니에 달카인과 결혼했다. 1849년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관현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한 후 테아트르 프랑수아 극장의 지휘자가 되었다. 1855년 자신의 극장인 부프 파리지앵을 열어 1866년까지 감독으로 있었는데 그곳에서 〈지옥의 오르페우스 Orphée aux enfers〉를 비롯해서 대부분 유명한 자신의 오페레타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그는 또 독일의 엠스에서 오페레타를 제작했으며 빈에서 오페라발레 〈라인 강의 물의 요정 Rheinnixen〉을 제작했다. 1864년 파리로 돌아와 바리에테에서 그의 성공작인 오페레타 〈아름다운 엘렌 La Belle Hélène〉(1864)을 제작했으며 그밖에 〈파리의 생활 La Vie Parisienne〉(1866)·〈젤로스탱 대공비 La Grande-Duchesse de Gérolstein〉(1867)·〈페리콜 La Périchole〉(1868) 등이 계속 성공했다. 1872~76년 테아트르 드 라 가이테에서 감독으로 있으면서 1874년 〈지옥의 오르페우스〉의 개정판을 공연했다. 그당시 오페라 페리크(요정에 대한 오페라)라고 묘사한 이 공연은 재정적으로 실패였다. 1876년 미국 순회공연을 했으며 남은 생애를 작곡에 전념하며 보냈다.

 

 

그의 유일한 대작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 Les Contes d'Hoffmann〉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는데 〈라인 강의 물의 요정〉에서 유명한 뱃노래를 발췌해 소개한 에른스트 기로에 의해 관현악으로 편곡되고 낭독부분이 첨가되었다. 오페라 판타스티크(환상 오페라)라고 묘사된 이 작품은 1881년 2월 10일 오페라고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의 음악의 모음극인 〈즐거운 파리 사람 Gaîté Parisienne〉(마뉘엘 로젠탈 편곡)은 발레 음악과 함께 대중적인 관현악 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는 유창하고 우아한 양식의 서법과 인물의 성격화와 풍자(신화적인 소재를 다루는 데 부적절한 부분에서 두드러짐)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로시니는 그를 '샹제리제의 작은 모차르트'라고 불렀는데 사실 그는 모차르트만큼이나 다작의 작곡가였다. 100곡이 넘는 무대음악을 작곡했으며 그중 대다수가 시대를 초월하여 20세기까지 연주 레퍼토리에 남아 있다.

 

 

33. 주페[Franz von Suppe](1819-1895)

  

Suppé는 Suppè라고도 씀. 본명은 Francesco Ezechiele Ermenegildo Cavaliere Suppé Demelli.

1819. 4. 18 오스트리아 제국 달마치야 스팔라토(지금의 크로아티아 스플리트)~1895. 5. 21 오스트리아 빈.

 

오스트리아의 경가극 작곡가.

 

주페-오페라 〈경기병〉 서곡

20세기 중반까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경음악에 영향을 끼쳤다. 빈 극장과 요제프슈타트를 비롯한 빈의 다른 극장에서 지휘했다. 빈에서 〈경기병 Leichte Kavallerie〉(1866)·〈파티니차 Fatinitza〉(1876)·〈보카치오 Boccaccio〉(1879) 등의 희가극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그밖에도 합창곡, 교향곡 1곡, 현악4중주곡 등을 작곡했다.

 

 

 34. 프랑크[Cesar Auguste Franck](1822-1890)

 

1822. 12. 10 네덜란드 리에주~1890. 11. 8 프랑스 파리.

 

벨기에 태생 프랑스의 오르간 연주자, 작곡가.

 

교향곡 D단조,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 Variations symphoniques〉 같은 낭만적 대작으로 유명하다. 발롱 지방 출신인 아버지와 독일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했다. 피아노의 연주 솜씨가 뛰어나 그의 아버지는 1834년 프랑크를 데리고 엑스와 브뤼셀 등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1년 뒤 파리로 보내 파리 음악원 교수로 있던 보헤미아의 작곡가 안톤 라이하에게 배우게 했다. 1836년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요제프를 비롯한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으며 1837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1년이 못 되어서 그는 독보력(악보 읽는 능력)시험에서 명예대상(Grand Prix d'Honneur)을 받았으며, 1840년에는 푸가 부문에서 1위, 1841년에는 오르간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로마 유학이 상으로 주어지는 로마 대상의 준비를 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의 동생과 프랑크에게 대가로서의 경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고 연주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음악원을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 돈을 벌기 위하여 연주회를 열었는데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주로 그당시에 유행했던 오페라 접속곡과 직접 작곡한 대중적 환상곡이었다. 1840년 이후 관심이 오르간 쪽으로 기울자 작품은 진지해졌으며 그때 작곡한 3개의 트리오(삼중주곡)는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에게 감동을 주었다. 1846년 1월 4일 파리 음악원 무대에서 처음 연주되었던 칸타타 〈루트 Ruth〉는 그의 야심작이었다. 내키지 않는 연주회 공연, 수많은 언론의 악평, 수입을 위해 강행해야 하는 교습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착취하는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된 다음에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크는 본명이 펠리시테 사일로트인 여배우 데스무소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극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프랑크는 1848년 결혼을 앞두고 잠시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서 그의 생활 방식은 그뒤 42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르간 연주자와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생활은 소박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했다. 여름과 겨울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2시간 뒤부터 하루 종일 계속되는 교습을 시작했다. 작곡은 주로 이른 아침 시간과 여름휴가 동안에 했다.

   

1851년 생장생프랑수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며, 1858년에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생트클로틸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생트클로틸드의 오르간실에서는 다른 오르간과 합창곡의 역작과 더불어 그를 유명하게 한 즉흥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즉흥음악은 연주하는 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식적인 직분을 맡기 전에 작곡된 음악으로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달콤하고 서정적이다. 그러나 프랑크와 그의 친구인 샤를 구노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면서 그들의 교회음악은 어려워지고 엄격해지게 되었다. 1872년에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로 임명됨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중요한 경력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과 관심밖의 일이어서 무척 놀라워했다. 대인관계에서 솔직하고 직선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얻었다. 그에 대한 적대감은 그가 오르간 수업시간을 작곡 수업시간으로 만들어버리고, 보수적인 그의 작곡 기법에 반감을 품은 학생들이 늘어나자 더해졌다.

  

1860년대 후반에 이미 프랑크에게서 개인교습을 받았던 앙리 뒤파르크와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이 그의 제자들 중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71년 2월 25일 국립음악협회가 설립되어 진지함, 정서적 안정, 기술적 기초가 마련될 준비가 갖추어지고 난 후 비로소 그는 저술과 학생들과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2년 프랑크의 제자가 된 프랑스의 작곡가 뱅상 댕디의 열정적인 선전은 피아노 연주와 작곡의 대가가 되는 데 실패해서 의기소침해 있는 프랑크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880년대 초반 에른스트 쇼송, 피에르 드 브레빌, 샤를 보르드, 기 로파르츠를 포함한 프랑크파(派)가 형성되었다. 그뒤 뱅상 댕디가 〈세자르 프랑크 전기〉(1906)에서 보인 열렬한 찬사는 한때 프랑크가 '제자들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80년부터 1990년 그가 죽기까지 작곡한 음악을 보면 위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화려한 연주와 기교적 성향의 작곡의 대가였던 그는 초기에도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그러한 예가 나타나고 있는 작품으로 피아노를 위한 〈Prélude, aria et final〉(1887 완성, 마지막 악장)과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랑크의 음악적 쇠퇴기의 몇 작품은 페렌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더욱 멀게는 베토벤의 예를 들면서 피상성과 강렬한 정서의 배양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890년 프랑크는 길가에서 마차채에 옆구리를 찔려 늑막염에 걸려서 죽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진지함은 프랑크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유래한다. 프랑크의 천사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와 고결함, 세상사에 대한 순박함은 작품의 경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활기 없다는 평도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특성과 상반되는 경향을 가진 작품 창작요구에 직면했을 때 그의 특성이 결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가 되는 작품은 1870년대에 작곡되어서 사후에 연주되었던 오라토리오 〈Les Béatitudes〉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Le Chasseur maudit〉(1882)·〈귀신 Les Djinns〉(1884)이 있다. 한편 1886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와 〈교향적 변주곡〉은 그가 기호와 정서의 다양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수했던 철저한 장인정신과 따뜻하고 고귀한 음악성의 완벽한 기념물로 남아 있다.

 

  

35. 스메타나 [1824.3.2~1884.5.12]

 

요약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곡가.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국민극장의 전신인 가극장(假劇場)의 지휘자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교향시에는 리스트 등 신독일파의 수법을 도입하여 민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으며 《국민의용군행진곡》, 《자유의 노래》 등의 작품을 남겼다.

 

원어명 Bedřich Smetana

국적 체코

출생지 체코 보헤미아 리토미실

주요작품 《국민의용군행진곡》,《자유의 노래》

 

본문

보헤미아의 리토미실 출생. 아버지는 맥주 양조업자로 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찍이 프라하에 나가 프록시에게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뛰어나 한때는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꿈꾸었으나, 1848년 오스트리아 2월혁명의 여파로 프라하에도 6월에 혁명운동이 일어나 이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인 체코슬로바키아민족으로서의 의식에 눈떠, 민족운동에서의 작곡가의 역할을 새삼 자각하게 되었다.

 

혁명 실패 후의 가혹한 억압시대에는 스웨덴으로 건너가(1856) 5년간 에보리에 체재,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자취를 남겼다. 1860년대 오스트리아 정부의 탄압이 느슨해지자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운동이 되살아났고, 그도 귀국하여 이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지휘자 ·작곡가 ·평론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62년 체코슬로바키아 국민극장의 전신인 가극장(假劇場)이 프라하에 건립되자 이 극장을 위해 작곡한 오페라 《팔려간 신부 Prodaná nevěsta(The Bartered Bride)》를 상연, 큰 성공을 거두고, 그해 가을에는 이 가극장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여러 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874년 50세의 한창 나이에 숙환인 환청(幻聽)이 악화되어 10월에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모든 공적 활동을 중지하고 프라하 교외에 은퇴하였다. 그는 오페라에 민족적 제재를 많이 쓰고 음악에는 폴카 ·프리안트 등 민족무용의 리듬을 많이 도입하였으나, 국민오페라에서는 민요를 도입하지 않고, 정신면에서 체코적인 요소를 만들어 나가는 데 전념하였다. 또 교향시에는 리스트 등 신독일파의 수법을 도입하여 민족적인 음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국민의용군행진곡》 《자유의 노래》 등이 있고, 오페라에는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가의 사람들》(1866) 《달리보르 Dalibor》(1868) 《리부셰 Libuše》(1872) 《두 명의 홀아비》(1874) 등이 있다. 만년의 작품으로는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Mávlast》(1874∼1879), 현악 4중주곡 《나의 생애로부터 Z mého života》(1879) 등이 있다.

 

 

36. 브루크너 [Josef Anton Bruckner, 1824.9.4~1896.10.11]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받고 바그너의 작품을 접한 뒤 창작에 자극을 받았다. 미사곡, 교향곡, 합창곡 등을 작곡했다. 19세기 후반 최대 교회음악가였고 최근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국적 오스트리아

출생지 오스트리아 린츠 근처 안스펠덴

주요작품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

 

린츠 근처의 안스펠덴 출생.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그도 역시 교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은 뒤 조교원까지 지냈으나, 그 사이 피아노·오르간·통주저음(通奏低音)·화성·대위법 등을 공부하고, 또 성플로리안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일하면서 J.S.바흐의 작품과 G.P.팔레스트리나, A.가브리엘리 이후의 교회음악 연구를 계속하여, 그 스스로도 《레퀴엠》(1854)과 《미사 솔렘니스》(1854) 등을 쓰고 그는 30세가 넘어서야 교사직을 떠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855년 린츠대성당의 오르간연주자가 되어 오르간 연주자와 즉흥연주자로서 인정을 받았으며, 동시에 린츠극장 악장인 키츨러에게서 악식론(樂式論)과 악기론(樂器論)을 배워, 고전파와 낭만파의 기악곡형식을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키츨러를 통하여 바그너의 작품에 접하여 창작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린츠시대에 그는 미사곡 3(제1·제2·제3)과 교향곡 2(0번·제1번) 같은 큰 곡을 작곡하고 1868년에는 빈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빈에 정주하였으며, 1878년에는 빈대학 강사도 겸하였다. 제2번부터 제8번까지의 교향곡은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브루크너는 바그너에게 깊이 심취하여 1865년에는 그와 만나고 작품도 헌정(獻呈)하였으며, 이러한 그의 행동이 절대음악을 중시하는 전통파(反바그너派로 대표격은 한슬리크)의 반감을 사게 되었으나 이에 저항하는 그를 위해 G.말러·괼레리히·샬크형체·레베 등이 결속하여 그를 도와 주었으며, 그도 《관현5중주곡》(1879) 《테 데움》(1881) 《제7교향곡》(1883) 《제 8교향곡》(1885)의 성공으로 비로소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졌다.

 

만년에는 병에 걸려 음악학교의 직책을 사임하고, 합창곡 《타펠리트》(1893) 《헬골란트》(1893) 등 작품을 썼을 뿐 창작보다는 오히려 옛 작품인 교향곡의 개작과 퇴고(推敲)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9교향곡》을 완성 못하고 사망하였다. 1891년 그는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또 그는 19세기 후반의 최대 교회음악가였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로서도 평가되고 있다.

 

 

37. 슈트라우스 [Johann Strauss, 1825.10.25~1899.6.3]

 

요약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J.B.슈트라우스의 장남이다. 악단을 이끌며 연주여행을 하였고 작곡에도 열중하여 새로운 독자적인 왈츠양식 '연주회왈츠'를 낳았다. 왈츠에 처음으로 합창이 곁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등의 대규모 왈츠와 《집시남작》등의 오페레타를 작곡하였다.

 

별칭 왈츠의 왕

국적 오스트리아

주요작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 《집시남작》

 

본문

'왈츠의 왕'으로 불리며 '왈츠의 아버지' J.B.슈트라우스의 장남이다.

 

아버지는 처음 그를 상공학교(商工學校)에 입학시켜 은행업을 배우게 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이 강한 그는 아버지 몰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1843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거생활을 하자 이를 기회로 생애를 음악에 바치기로 결심하고 피아노 교수로 생계를 꾸리면서 바이올린 외에 작곡이론을 배웠다.

 

처음에는 교회음악 작곡에 뜻을 두었으나, 19세 때 시 당국의 허가를 얻어 15인조악단을 조직, 무도회에 데뷔하여 그 자신의 작품 1∼4번의 무도곡을 연주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아버지와의 갈등은 1846년에 일단 수습되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악단에는 가담하지 않고 자기 악단을 인솔하여 독립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849년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악단도 지휘하게 되어, 동생이 악단에 가담하기까지 수년간 그는 분주한 세월을 보냈다.

 

1851년에는 함부르크·프라하·드레스덴·라이프치히·바르샤바 등지에서 연주를 하고, 분주한 가운데 작곡에도 열중하여 1853년에는 1년 동안에 27곡 이상을 작곡하였다.

 

그러한 정열적인 활동으로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자 악단을 동생에게 맡긴 후 요양지로 옮겨다니다가 건강을 회복한 그는 1855년에 다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까지 연주여행을 하였다.

 

1862년 통칭 예티(Jetty)라고 불린 가수 헨리에테 트레프츠와의 결혼으로 커다란 전기를 맞았다. 그의 연주는 공원에서의 연주회와 자기 작품의 첫공연에 한정되고, 온갖 정력이 작곡에 투입되어 새로운 독자적인 왈츠양식 '연주회왈츠'를 낳았다.

 

《아침 신문》(1864)을 비롯하여 1867년부터는 왈츠에 처음으로 합창이 곁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예술가의 생애》 《빈 숲속의 이야기》 《술·여자·노래》 《빈 기질》 등의 대규모 왈츠의 걸작을 계속 작곡하고, 1870년 어머니와 동생 요제프가 모두 세상을 떠나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오펜바흐와 수페 등에게서 자극을 받아 그때부터 오페레타의 작곡도 시작, 《박쥐》 《집시남작》을 비롯한 작품으로 당시 빈 오페레타계에 군림하게 되었다.

 

1878년 아내가 죽자 30세 연하인 릴리 디트리히와 재혼했으나 어울리지 않는 이 결혼은 얼마 후 파탄되고 1887년 아델레 도이치와 재혼, 빈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복받는 만년을 보냈다.

 

그는 오페레타 16, 왈츠 168곡을 비롯하여 많은 무도곡을 작곡하였는데, 이 모든 작품에는 인생을 찬미하는 빈의 독특한 분위기가 담겨 있다.

 

 

38.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5.7~1897.4.3]

 

요약

독일의 작곡가. 오페라 이외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곡했다. 독일음악의 전통을 보수적일 만큼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이나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닌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낭만주의 시대에 고전파음악의 전통을 지켜 독자적 작풍을 견지했다.

 

국적 독일

출생지 독일 함부르크

주요작품 《독일레퀴엠》(1868), 《알토랩소디》(1869), 《대학축전서곡》(1880), 《승리의 노래》《11의 코랄전주곡》(작품 l12)

 

본문

함부르크 출생.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배우고, 7세 때 O.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10세 때 음악회에 나가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자,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그의 재능을 이용하여 치부(致富)할 생각이었으나 코셀은 이를 반대하고 그의 스승인 E.마르크센에게 브람스를 사사받도록 하였다.

 

여기서 그는 작곡법, 고전음악의 가치, 음악의 견실한 구성법과 이론을 배웠는데, 이는 그의 음악적 생애의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1850년까지는 브람스의 고난의 시대가 계속되었다.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술집 ·식당 ·사교장 등을 돌면서 피아노 연주를 하였으며 여가가 나면 피아노 개인지도,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편곡 등으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요아힘을 알게 되어 1853년 그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 이 여행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슈만부처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각 방면에 소개하여 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854년 신경쇠약으로 인한 슈만의 자살미수와 입원, 그리고 1856년의 사망에 이르는 약 2년 동안에 브람스는 작곡에 몰두하는 한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슈만가(家)를 도왔다.

 

한편 슈만의 부인이며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의 우정도 깊어져 갔다. 1857∼1859년 그는 처음으로 공적인 직위를 얻어 데트몰트궁정에서 피아니스트로 근무하면서 작곡에도 몰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근무를 마친 후 1862년 가을까지는 고향인 함부르크로 옮겨 합창단의 지휘, 합창곡의 작곡 등을 하다가 1862년 9월 빈으로 이주, 1863년 징아카데미합창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그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865년 2월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추도하는 작품에 착수, 1868년에 대작 《독일레퀴엠》을 완성하고 1869년에는 슈만의 셋째 딸 유리에에 대한 그의 실연을 노래한 《알토랩소디》를, 1871년에는 프로이센의 대 프랑스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노래》를 작곡하는 등, 관현악부 성악곡을 많이 만들었다.

 

1872년 가을부터 1875년까지는 빈 음악인협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그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를 지휘하였는데, 이때의 관현악단을 통한 실지 체험은 1876년에 완성된 《제1교향곡》에 잘 나타나 있다. 브람스의 작곡가로서의 진면목은 이때를 전후하여 발휘되기 시작했고 대가로서의 품격도 갖추게 되었다.

 

1878년 이후 매년 걸작을 발표하였는데, 《바이올린협주곡(D장조)》(작품 77) 《바이올린소나타》(작품 78) 등은 모두 이 무렵에 발표된 것들이다. 1879년 브로츨라프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되자, 이에 대한 사의로 그 이듬해 《대학축전서곡》(작품 80)을 작곡하였다. 이어 1890년까지 《비극적 서곡》(작품 81), 《피아노협주곡 제2번》(작품 83), 《현악 5중주곡》(작품 88) 등 수많은 작품을 완성하였으나, 1890년부터는 체력과 창의력의 쇠퇴를 자각하고 대곡의 창작을 단념, 신변 정리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1891년 3월 뛰어난 클라리넷 주자 R.뮐펠트의 연주를 접하자, 다시 영감과 창의력을 얻어 1891년 《클라리넷 3중주곡》(작품 114) 《클라리넷 5중주곡》(작품 115)과 1894년 두 곡의 클라리넷소나타 등 일련의 클라리넷을 포함한 실내악곡을 쓰게 되었다. 1896년 3월 그의 평생의 친구인 클라라가 졸도한 후 병세가 악화되자,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성서를 토대로 한 《4개의 엄숙한 노래》(작품 121)를 작곡하였다.

 

5월 20일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뒤 브람스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오르간용의 종교적인 오르간곡 《11의 코랄전주곡》(작품 l12)을 작곡하였다. 그러나 1897년 4월 3일 마침내 간암으로 이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오페라 이외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음악은 독일음악의 전통을 보수적일 만큼 존중하며, 견고한 구성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주의적인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 때로는 북독일적이며, 때로는 빈(Wien)적이지만, 인간 브람스의 피가 흐르는 매우 소박한 풍격이 그의 음악의 큰 매력이 되고 있다. 그만큼 브람스의 작품에서는 호화스런 색채감각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신앙심이 두터운 프로테스탄트 신자이었기 때문에 종교적이면서도 죽음의 예감이 감도는 장중한 작품들이 많으며, 특히 만년에 발표한 성악곡에는 이러한 것들이 많다.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화려한 시대에 있어 고전파음악의 전통을 지킴으로써, 시대의 풍조에 휘말리지 않는 독자적 작풍을 견지한 작곡가이다. 또한 그는 R.슈트라우스, A.드보르자크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39. 보로딘 [1833.11.12~1887.2.27]

 

요약

러시아의 작곡가·화학자·사회개혁자. 페테르부르크의과대학에서 조교수를 지내며 화학자 지닌의 제자가 되어 유기화학연구를 하였다. 작곡가로서는 신러시아악파에 속한다. 연구생활 중 작곡활동을 하였으며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원어명 Aleksandr Porfir'evich Borodin

국적 러시아

출생지 러시아 페테르부르크

주요작품 교향곡 2번(1876), 현악4중주곡(1881), 오페라 《이고리공》(미완성)

 

본문

페테르부르크 출생. 러시아의 귀족 게데아노프공작의 사생아로 태어나 농노(農奴) 보로딘의 호적에 얹혔다. 그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도 사회활동을 규제당하였으며, 그와 같은 사회적 불공정이 그의 민주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악재(樂才)를 보였고, 화학에도 열중하여 1850년 페테르부르크의과대학에 들어갔으며, 58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하였다. 1862년 귀국 후는 모교의 조교수가 되고, 여기서 화학자 지닌의 제자가 되어 유기화학연구를 계속하였다.

 

작곡가로서는 신러시아악파(樂派), 즉 5인조에 속한다. 연구생활의 틈을 이용한 작곡활동이었으나 러시아의 유수한 실내악 작곡가로, 또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첼로의 명수이기도 했다. 작품은 동방적(東方的)인 색채가 농후하며 대표작에 교향곡 2번(1876), 현악4중주곡(1881), 오페라 《이고리공》(미완성) 등이 있다.

 

 

40. 생상스 [1835.10.9~1921.12.16]

 

요약

프랑스의 작곡가. 작품은 모두 고전적인 단정함, 세련된 관현악법에 의한 화려한 표현이 특징이다.

 

원어명 Camille Saint-Saëns

국적 프랑스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작품 《삼손과 데릴라》(1877)

 

본문

파리 출생. 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흔히 모차르트의 유년시절과 비교되었다. 1846년 10세 때 데뷔하고, 12세 때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여 오르간과 작곡을 배웠다.

 

1853~1877년 마들렌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근무하면서는, 오르간 ·피아노 연주의 명수, 즉흥연주의 대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 1861∼1865년에는 에콜 니데르메이에르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교수하였는데, A.메사제, G.포레 등은 이 시기의 제자들이다.

 

1871년 유지들과 파리에서 '국민음악협회'를 결성하고 유력한 멤버로서 프랑스음악계에 교향악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작곡가로서는 1852년과 1864년에 로마대상에 낙선하여 그 이후 1880년경까지는 별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국민음악협회, C.라무뢰 등의 오케스트라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작품에는 《삼손과 데릴라 Samson et Dalila》(1877)를 비롯한 13편의 오페라, 교향곡 4, 피아노협주곡 3, 그 밖에 피아노곡을 비롯한 많은 기악곡이 있다. 작품은 모두 고전적인 단정함, 세련된 관현악법에 의한 화려한 표현이 특징이다.

 

 

41. 브루흐 [Max Bruch, 1838.1.6~1920.10.2]

 

요약

독일의 작곡가·지휘자. 여러 악단의 지휘자, 브레슬라우 연주협회장을 지냈다. 작풍은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아 로맨틱한 아름다운 음향을 가졌다. 창작의 주된 영역은 합창음악이나 그 밖에도 많은 성악곡과 연주곡, 오페라가 있다.

 

국적 독일

출생지 독일 쾰른

주요작품 《콜니드라이》

 

본문

쾰른 출생. 본에서 이론을 배운 후 1852년부터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힐러와 라이네케에게 작곡을 사사하였다.

 

1865년 코블렌츠의 연주협회 지휘자, 1867년 존더스하우젠의 궁정악단 지휘자, 1880년부터는 영국의 리버풀교향악단 지휘자, 1883∼1890년에는 브레슬라우 연주협회장을 지냈다. 1891∼1910년에는 베를린 예술아카데미의 교수 겸 작곡부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작풍은 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아 로맨틱한 아름다운 음향에 특징이 있다.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도 알려졌으나 오늘날에는 1868년 라인음악제에서 요아힘의 초연으로 대성공을 거둔 바이올린협주곡 제l번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의 창작의 주된 영역은 합창음악이었으나, 3곡의 바이올린협주곡과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콜니드라이》가 가장 자주 연주되며, 그 밖에도 많은 성악곡과 오페라가 있다.

 

   

42. 비제 [Georges Bizet, 1838.10.25~1875.6.3]

 

요약

프랑스의 작곡가. 비제는 오페라음악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어느 것이나 등장인물의 정확한 표현, 빈틈없는 무대구성, 세련된 작곡기법과 새로운 맛으로 당시의 오페라 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국적 프랑스

출생지 프랑스 파리

주요작품 《카르멘 Carmen》(1875)

 

본문

파리 출생. 아버지는 성악교사,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1848년 10세 때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A.마르몽텔에게 피아노를, F.브누아에게 오르간과 푸가를 P.지메르만에게 작곡을 배우고, 때로는 구노의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1853년 지메르만이 죽은 후에는 알레비에게 사사하였는데, 그는 구노와 알레비에게서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6년 칸타타 《다윗 David》을 로마대상 작곡 콩쿠르에 제출하여 입상하고 다음해인 1857년에는 칸타타 《클로비스와 클로틸드 Clovis et Clotilde》로 로마대상을 받아, 관비로 3년 가까이 유학했다가 파리로 돌아와서는 그때부터 오페라 창작에만 주력하였다.

 

1863년 이국적인 선율의 3막 오페라 《진주잡이 Les Pêcheurs de Perles》를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비제의 최초의 중요한 작품이다. 그리고 1869년 2월 로마 체재 중의 회상을 담은 모음곡 《로마의 추억 Souvenirs de Rome》(나중에 교향곡 《로마》로 개작되었음)이 파들루의 연주회에서 연주되고, 또 6월에는 은사인 알레비의 딸 주네비에브와 결혼하였다.

 

그 후 1872년 보드빌오페라극장의 지배인 L.카르발로의 권고로 A.도데의 소설을 극화한 《아를의 여인 L’Arlésienne》의 부수음악 27곡을 써서 성공하고 그중 4곡을 스스로 선택한 모음곡은 파들루의 연주회에서 연주되어 청중을 매료하였다. 또 그의 유명한 오페라 《카르멘 Carmen》은 1875년 3월 오페라코미크에서 초연되었는데 3개월 후인 6월 3일 비제가 37세로 요절할 때까지 무려 33회나 공연되었다 한다.

 

이 오페라는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연주된 것으로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비제는 오페라음악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는데, 어느 것이나 등장인물의 정확한 표현, 빈틈없는 무대구성, 세련된 작곡기법과 새로운 맛으로 당시의 오페라계에 큰 자극을 주었다.

 

특히 《카르멘》은 노래도 음악도 낭비가 없으며, 극과 음악이 잘 융합되어 있다. 이는 프랑스의 노래답게 샹송이나 쿠플레를 도입하였으며, 악기의 개성을 잘 살린 데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국정취가 많이 풍기는 이 곡은 그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뛰어났으며, 이 작품은 같은 시대에 있어서나 그 다음 시대에 있어서나 특히 베리스모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극음악적 재능은 특히 제4막의 대단원의 장면에서 노래가 서로 얽히면서 합창과 관현악이 숨막힐 듯이 밀집 ·응결하는 극적 효과에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이 작품은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와 함께 R.롤랑이 말했듯이 프랑스오페라의 쌍벽을 이루는 명작으로서,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43. 무소르크스키 [Modest Petrovich Musorgskii, 1839.3.21~1881.3.28]

 

요약

러시아의 작곡가. 여러 편의 피아노곡 ·교향곡 ·오페라 ·가곡 등을 작곡했고 러시아 고유의 선법과 대담한 화성, 변칙적인 리듬 등을 구사해 근대 인상파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국적 러시아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러시아 프스코프주

주요작품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74) 《어린이의 방》(1868∼1872) 《전람회의 그림》(1874)

 

본문

프스코프주(州) 출생.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다. 1852년 근위사관학교에 입학, 1859년 임관되자 곧 예비역에 편입되어 음악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M.A.발라키레프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국민악파 5인조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작곡에 전념하였다. 1861년 농노해방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으로 1863년부터 관리가 되고, 1865년 어머니가 죽자 심한 음주벽과 신경쇠약으로 주위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여러 편의 피아노곡 ·교향곡 ·오페라 ·가곡 등을 작곡하였으며, 러시아 고유의 선법(旋法)과 대담한 화성(和聲), 변칙적인 리듬 등을 구사하는 기법으로 근대 인상파음악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 C.A.드뷔시를 비롯한 많은 근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푸슈킨의 희곡을 작곡한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unov》(1874)는 그 고도의 음악성으로 높이 평가되며, 피아노곡과 가곡으로 《어린이의 방》(1868∼1872) 《죽음의 노래와 춤》(1875∼1877) 《전람회의 그림》(1874) 등이 있다.

 

 

44. 차이코프스키 [Pyotr Il'ich Tchaikovskii, 1840.5.7~1893.11.6]

 

요약

러시아의 작곡가로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를 지내다가 40년간 창작에 전념하여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을 가져왔다. 교향곡, 오페라, 발레곡 이외에 다수의 실내악곡, 협주곡 등을 남겼으며 특히 발레곡 《백조의 호수》,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 등이 유명하다.

 

국적 러시아

출생지 러시아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

주요저서 《화성학 개요》(1875)

주요작품 《백조의 호수》(1876) 《만프레드 교향곡》(1885) 《비창》(1893)

 

우랄지방 캄스코보트킨스크 출생.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립(帝立) 법률학교를 졸업하고 관리가 되었다가, 1860년 안톤 루빈스타인이 주재한 음악교실에 입학, 이 교실이 러시아 최초의 음악원으로 개편되면서 제1기생이 되었다. 그 뒤 모스크바음악원이 설립되자 교관이 되었으나(1866∼78), 77년 이전부터 러시아 철도왕(鐵道王)의 미망인 폰 메크 부인(1831∼94)으로부터 연금을 받아왔기 때문에 곧 교직을 떠나 창작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는 얼마 후 교향곡 제4, 5, 6의 3곡을 완성하고 93년 10월에는 제6교향곡을 완성 초연하였는데, 그날로부터 며칠 후인 11월 콜레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음악은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엽에 걸쳐 성립된 러시아 고전주의 음악의 완성으로 볼 수 있으나 낭만파의 수법을 초월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러시아악파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변박자(變拍子)와 민요의 사용도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고, 비조리성(非條理性)과 논리의 비약이 없어 서유럽에서는 높이 평가되지 못하고 속류(俗流)로 취급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그의 작품의 역사적 의의를 찾아보면 약 40년간에 걸친 창작활동 중에는 시민세대의 음악의 기점(基點)과 종말이 있었고,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악파의 중요한 일익을 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법상 피아노 ·바이올린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음은 물론, 이것이 고전적인 작풍과 서로 작용하여 그의 음악에 신선하고 쉬운 영상(影像)을 심어줌으로써 차이코프스키음악의 독특한 매력을 지탱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의 작품에는 표제음악적(標題音樂的)인 색채가 짙다. 무대음악은 별도로 하더라도, 교향작품의 거의 대부분이 표제적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 사상성이 매우 강하다. 특히 교향시 《만프레드 교향곡:Manfred Symphony)》(1885)은 문학적 사고가 깊은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오페라 가운데서도 푸슈킨의 원작을 대본으로 한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파의 역사주의와는 반대로 동시대의 증언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1854년 14세 때의 《왈츠》에서 시작하여 1893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 《비창》(작품 74)으로 끝났다. 작품 74는 자신이 붙인 번호이고, 그 후의 보주(補註)로 80, 이 밖에 번호 없는 초기의 소품이 약 20곡 현존한다. 즉 교향곡 6곡, 미완성의 교향곡 1곡, 교향시 1곡, 오페라 11곡, 발레곡 3곡 이외에도 다수의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및 협주곡 등이 있다.

 

그의 창작활동은 모스크바음악원 교수를 그만 둔 시기(78)를 중심으로 2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교직과 비평에 종사하였던 시기로 작품의 경향도 낭만적인 향취와 피아노협주곡 제1번(75)과 바이올린협주곡(78) 등에서 볼 수 있는 현란한 색채감을 지니고 있다.

 

후기는 제4번(77) 이후의 3곡의 교향곡, 그리고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Evgenii onegin》(78)을 포함하여, 모두가 충실한 창조력과 기법의 완결을 상기시킨다. 이 두 시기 사이에는 그의 불행한 결혼문제가 개재되어 있어 그의 작풍변화의 중요 요인이 되고 있다.

 

교향곡 중에서는 전기의 것 중 제2번(1872)이 소러시아민요에서 취재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 제4번 이후의 3곡의 교향곡들은 단일 모티프인 이른바 ‘숙명의 동기’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 3곡을 일련의 곡으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발레음악에서는 《백조의 호수:Swan Lake》(1876) 《잠자는 숲 속의 미녀:The Sleeping Beauty》(1889) 《호두까기 인형:The Nutcracker》(1892)의 3곡 중 특히 《백조의 호수》가 장대한 짜임새와 다채로운 음악으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페라에서는 푸슈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예브게니 오네긴》과 《스페이드의 여왕:The Queen of Spades》(1890)이 유명하다. 특히 전자는 러시아문학사에서 등장하는 ‘쓸모없는 사람’의 한 사람인 오네긴을 주인공으로 하여, 러시아적인 인간상의 애환을 깊이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또 그의 방대한 작품들 중에서 실내악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3곡의 현악4중주곡(1871, 74, 76)은 보로딘, 타네예프의 작품과 더불어 러시아악파의 훌륭한 소산으로 간주되고 있다. 저작으로 《화성학 개요》(1875)가 있다.

 

 

45. 드보르자크 [1841.9.8~1904.5.1]

 

요약

체코의 작곡가. 자연스러운 음악 속에 체코민족의 애환을 담은 독자적인 작풍(作風)을 이루었다. 표제음악 전성기에 절대음악을 많이 작곡했고 미국 체류 중에는 니그로나 아메리칸 인디언 음악 요소를 곁들인 작품을 썼다.

 

원어명 Antonín Dvořák

국적 체코

출생지 체코 프라하 교외 넬라호제베스

주요작품 《신세계》 《루살카》

 

본문

프라하 교외 넬라호제베스 출생. 17세 때 프라하의 오르간학교에 들어가 2년간 공부하고 졸업 후 레스토랑·호텔 등에서 비올라를 켜오다가 1862년 프라하에 가설극장(假設劇場:훗날의 국민극장)이 신설되자 그곳 비올라 연주자가 되었다.

 

1866년 그곳 지휘자로 취임한 B.스메타나의 영향을 받아, 당시 고조된 민족운동의 와중에서 음악가로서 체코의 민족문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되었다. 1872년 애국적인 시 《백산(白山)의 후계자들》에 의한 합창 찬가가 호평을 받음으로써 인정을 받고, 1874년에는 성아달베르트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해부터 오스트리아 정부의 장학금을 얻기 위해 매년 작품을 제출하던 중 1877년 심사원이던 J.브람스에게 인정되어 베를린의 출판사에서 작품이 출판되면서 유명해졌다.

 

이때부터 여러 연주자가 그의 실내악이나 관현악곡을 베를린·런던에서도 연주하게 되어, 그의 명성은 국내외로 퍼졌으며 1878년부터 지휘를 시작하여 1884년 이후 영국을 9회나 방문하여 자작곡을 지휘, 대환영을 받았다. 1891년 프라하음악원 교수가 되고, 같은 해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2년에는 뉴욕의 내셔널음악원 원장으로 초빙되어 도미했고, 다음해 미국에서의 신선한 인상을 소재로 교향곡 9번 《신세계 From the New World》를 작곡했다. 1895년 4월 프라하로 돌아온 후로는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과 창작에 전념하여, 1901년 프라하음악원 원장이 되고, 오스트리아 상원의원에 임명되는 등 음악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으나, 1904년 신장병으로 사망하였다.

 

드보르자크는 2년간 오르간학교에서 공부한 이외에는 거의 독학으로 베토벤, 슈베르트를 연구하였다. 한때 그는 바그너, 리스트에도 열중하였으나 자연스레 물이 흐르는 듯한 음악 속에 체코민족의 애환을 담은 독자적인 작풍(作風)을 이루었다. 표제음악 전성기에 절대음악(絶對音樂)을 많이 작곡한 그는 브람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미국에서 귀국한 다음에는 교향시와 오페라 이외의 것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미국 체류중에는 니그로나 아메리칸 인디언 음악에 흥미를 느껴 그 요소를 곁들인 작품을 썼으며, 이런 작품이 그의 대표작처럼 되었으나, 미국 체류시대 이외의 것도 재인식되었다. 주요작품으로 오페라 《루살카》 외 6, 교향곡 9, 교향시 5, 교향서곡 5, 바이올린협주곡 ·첼로협주곡 각 1, 현악4중주곡 8, 피아노3중주곡 3편 등이 있다.

 

 

46. 마스네 [1842.5.12~1912.8.13]

 

요약

프랑스의 작곡가. 오페라 창작에 전념했으나 그 외 관현악곡 ·가곡 ·부수음악 ·피아노곡 ·종교음악 등도 작곡했다. 그의 음악은 모두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인상적이다.

 

원어명 Jules Emile Frédéric Massenet

국적 프랑스

출생지 프랑스 리옹 근처 몽토

주요수상 로마대상(1863)

주요작품 《라올의 왕》(1877) 《마농》(1881) 《베르테르》(1892)

 

본문

리옹 근처 몽토 출생. 1851년 파리음악원에 입학, 피아노 ·작곡 등을 수학하고 1863년 로마대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에 유학한 후 오페라 창작에 전념했으며, 《라올의 왕》(1877)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 작품에는 친구인 비제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그 후 《마농》(1881) 《베르테르》(1892) 《타이스》(1894) 《노트르담의 곡예사》(1902) 등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오페라 이외에 관현악곡 ·가곡 ·부수음악 ·피아노곡 ·종교음악 등도 있으며 그의 음악은 모두 섬세하고 감각적이며 인상적이다. 또 파리음악원의 교수로서 샤르팡티에, F.슈미트 등을 길러냈다.

 

 

47. 그리그 [Edvard Hagerup Grieg, 1843.6.15~1907.9.4]

 

요약

노르웨이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민족주의적인 작곡가들과 사귀면서 독자적 작풍을 확립하였다. 작품 속에 민족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많이 도입하고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다수 만들어 오늘날 노르웨이 음악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국적 노르웨이

출생지 노르웨이 베르겐

주요작품 《페르귄트》《피아노협주곡》(1868)

 

본문

베르겐 출생. 스코틀랜드 가계(家系) 출신, 어머니에게서 피아노의 기초를 익힌 뒤 1858년부터 4년간 라이프치히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R.슈만과 J.멘델스존의 영향을 받았으며, 게제 ·노르들라크 등 민족주의적인 작곡가들과 사귀면서 독자적 작풍을 확립하였다. H.입센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부대음악(附帶音樂) 《페르귄트》(1876 초연)와 《피아노협주곡》(1868)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몸에 밴 고전적 형식에서 민족적인 음악을 찾으려고 애쓴 그는 《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에서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에 이르는 일련의 작품 속에 민족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많이 도입하였으며, 민족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다수 만듦으로써 오늘날 노르웨이 음악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48. 사라사테 [Pablo de Sarasate, 1844.3.10~1908.9.20]

 

요약

에스파냐의 바이올린 연주자·작곡가. 연주의 특색은 투명하고, 부드러우며 감미로운 음색과 화려한 기교의 구사에 있었다. 폭넓은 비브라토(떨려 울리는 음)와 개성적인 리듬의 매력을 잘 살린 연주, 특히 에스파냐 풍의 연주 등에 뛰어났다.

 

국적 에스파냐

출생지 에스파냐 팜플로나

주요작품 《치고이너바이젠》

 

본문

팜플로나 출생. 8세 때부터 수도 마드리드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1856년 여왕 이사벨라2세와 함께 나바라주(州)의 장학금으로 파리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알라르에게 바이올린을 사사(師事)하였다.

 

졸업 후 1861년 런던에서의 첫 공연을 시작으로 유럽 각지와 남북아메리카에 걸친 대연주여행을 하여 성공을 거두고, 파가니니(1782∼1840) 이래의 음악의 거장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870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와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각지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계속하였다. 연주의 특색은 투명하고, 부드러우며 감미로운 음색과 화려한 기교의 구사에 있었다. 폭넓은 비브라토(떨려 울리는 음)와 개성적인 리듬의 매력을 잘 살린 연주, 특히 에스파냐풍의 연주 등에 뛰어났다.

 

프랑스의 작곡가 랄로는 그의 최초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스페인교향곡》을 그에게 헌정(獻呈)하였고, 독일의 작곡가 브루흐(1838∼1920)도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그를 위해 썼다.

 

또 비제(1838∼1875)로 하여금 《에스파냐 무곡집》과 《카르멘 환상곡》 《서주와 타란텔라》 《호타 아라고네스》 등 바이올린 연주를 위한 기교적이며 화려한 효과를 가진 에스파냐풍의 관능적 선율의 작품을 작곡해 내게 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자신의 작품으로 《치고이너바이젠》이 유명하다.

 

 

49. 림스키코르사코프 [Nikolai Andreevich Rimskii-Korsakov, 1844.3.18~1908.6.21]

 

요약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주요 작품에는 《스페인기상곡》와 같은 표제음악과 《사드코》등의 오페라가 많다. 이들의 소재로는 러시아의 민요와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교적인 세계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국적 러시아

출생지 러시아 노브고로트 근처 티흐빈

주요저서 《러시아민요 100곡》(1877) 《화성학 실습》(1884) 《나의 음악 연지(年誌)》(1909)

주요작품 《스페인기상곡》(1887) 《사드코》(1898)

 

1844년 3월 18일 노브고로트 근처 티흐빈에서 출생하였다. 유년시절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였으나, 정식 음악교육은 받지 않고 1856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해군사관이 되었다. 이 무렵 발라키레프와 사귐으로써 ‘5인조(발라키레프, 큐이, 무소르크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한 멤버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작곡지도도 받았다. 1871년 페테르부르크음악원 교수로 초빙되고 또 해군군악대의 지휘자로서 내외의 명곡을 편곡하는 한편 궁정성가대지휘자도 지냈다.

 

1881년 무소르크스키가 사망하여 ‘5인조’가 해산되자, 악보 출판업자인 벨라예프의 도움으로 ‘벨라예프그룹’을 결성, 후진인 글라즈노프, 랴도프 등을 지도하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계기가 된 혁명소동 때는,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학생측에 서서 학원에의 권력개입을 거절한 탓으로 페테르부르크의 교수직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작품은 연주 금지처분을 당했다. 그후 복직이 되었으나 퇴직하고, 심장병으로 급서할 때까지 자택에서 작곡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의 작풍은 대체로 색채적이고 묘사적이며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운 화성적인 표현에 차 있다. 관현악의 묘사성 등은 러시아의 오페라, 표제교향시, 가곡 분야에 큰 영향을 끼치고 라벨, 레스피기 등 근대 작곡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주요 작품에는 《스페인기상곡》(1887) 《세헤라자데》(1888)와 같은 표제음악과, 《사드코》(1898) 《설희(雪姬)》(1882) 《금계(金鷄)》(1909) 등의 오페라가 많으며, 이들의 소재로는 러시아의 민요와 권력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이교적인 세계를 다룬 것이 대부분이다. 이 밖에 합창곡 ·가곡 ·피아노곡 ·관현악곡 등도 많다. 저서에는 《러시아민요 100곡》(1877) 《화성학 실습》(1884), 《관현악법 원리》(1913) 자서전인 《나의 음악 연지(年誌)》(1909) 등이 있다.

  

 

50. 포레 Faure, Gabriel Urbain(1845.5.12~1924.11.4) 프랑스

 

어려서부터 음악재능을 인정받아 9세 때 파리 니데르메이에 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중세 르네상스 종교음악과 J.S.바흐. F.J.하이든의 작품을 공부하고, 생상의 제자가 되어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등의 음악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863년 첫 작품인 피아노를 위한 《3개의 무언가》를 발표하였으며, 졸업 후 파리 마들렌교회의 오르가니스트, 파리음악원 작곡법 교수로 활동하였다. 1870~71년 프랑스, 프로이센전쟁에 종군한 뒤 1871년 당시 창립된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에 참가하였다.

   

1905년부터 청력상실과 건강쇠약으로 퇴직할 때까지 파리음악원 원장을 지냈으며, 1909년 아카데미회원이 되었다. 라벨, G.에네스코 등을 가르쳤으며 퇴직 후에도 창작활동을 계속 하였다. 근대 프랑스 서정파의 거장이며 나아가서는 근대 프랑스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천품이 나타났다. 우아한 기품을 지닌 그는 고전의 전통적인 형식과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의 기교는 최고의 프랑스 음악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자유롭고 신선한 음의 취급과 섬세한 시적 감정에 차있다고 하겠다.

 

세련되고 심오하며 감수성 넘치는 작풍으로 성악, 피아노곡, 실내악곡, 관현악곡 등 거의 모든 장르를 포괄하였는데, 전통적인 음악형식을 바탕으로 대담하고 창의적인 표현양식을 더하였다. 드뷔시, 라벨로 이어지는 근대프랑스음악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한 대표적 음악가였다.그의 내성적인 기질은 실내악, 피아노, 그리고 특히 가곡을 그의 예술의 기본 바탕으로 하였는데 가곡은 프랑스 말과 떠날 수 없으리만큼 되어 있다. 그는 전통을 존중하였으며 그의 주의 깊은 대담성은 드뷔시처럼 혁명적은 아니라 해도, 초기의 로맨티시즘을 제외하고는 그 수법을 순화하고 스타일을 세련시킨 그의 독창성과 노력은 놀랄 만하다.

 

낭만파의 시대로부터 근대의 길을 개척한 중요한 인물이며, 근대 프람스 음악계의 대 작곡가이며 교육가인 포레가 차지한 비중은 크다고 하겠다. 그는 드뷔시보다 20년 먼저 나서 근대 프람스 음악의 기초를 세운 선구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세련된 미는 순수한 프랑스 향취를 발하고 있으며 대담하고 화성적인 감각에는 지금까지 맛볼 수 없던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

 

그는 저명한 오르가니스트였으며 교육자로서 마스네의 뒤를 이어 파리 음악원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문하생에는 라벨, 에네스코, 슈미트, 블랑제 등 저명한 작곡가들이 있다. 그를 가리켜 대기 만성의 작곡가라고 한다. 걸작으로 알려진 실내악 작품들은 70세 이후의 소산이라 한다.

   

대표작품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자장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발라드》 관현악 모음곡 《마스크와 베르가마스크》 오페라 《프로메테우스》 《페넬로페》 가곡 《꿈꾼 뒤에》 《이스파한의 장미》와 100곡이 넘는 작품이 있으며 성악곡《진혼곡》과 야상곡, 즉흥곡 등 다양한 작품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의 실내악과 가곡은 브람스 이후 그만한 공적을 남긴 작곡가가 드물다. 그는 독자적인 선율과 화성적인 감각으로 자신의 개성적인 스타일에 알맞은 작품을 써 낸 작곡가라고 하겠다.

 

 

51. 엘가 [Edward Elgar, 1857.6.2~1934.2.23]

 

요약

영국의 작곡가로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 후기낭만파에 가까운 작풍으로 《수수께끼》, 《팔스타프》 등의 작품을 남겼다.

 

국적 영국

출생지 영국 잉글랜드 우스터

주요작품 《수수께끼》(1898) 《제론티어스의 꿈》(1900) 《팔스타프》(1913)

 

본문

잉글랜드 우스터 출생. 가톨릭교회 오르간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한때 아버지의 권유로 변호사 사무실에 근무하였으나, 음악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못하고 독학으로 각종 악기의 연주법과 작곡법을 습득하였다.

 

1880년경부터 직업음악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00년 오라토리오 《제론티어스의 꿈》으로 파셀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고, 31년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

 

작풍은 후기낭만파에 가까우며 대표작에 전기 오라토리오 외에 관현악변주곡 《수수께끼》(1898), 교향시 《팔스타프》(1913) 등이 있다.

 

 

52. 푸치니 [Giacomo Puccini, 1858.12.22~1924.11.29]

 

요약

이탈리아의 작곡가. 작품으로 《라보엠 La Boheme》, 《토스카 Tosca》,《나비부인 Madame Butterfly》 등이 유명하다. 유려하고도 애절한 정에 넘치는 선율, 자신의 양식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호소력이 큰 대본의 선택 등에 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국적 이탈리아

출생지 이탈리아 루카

주요작품 《나비부인》

 

본문

루카 출생. 아버지는 음악학교 교사로 종교음악 작곡가이기도 하였으나 어려서 사별하였다. 일찍이 앙제로니에게 음악을 배우고 10세 때 루카의 어느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있으면서 악재를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G.베르디의 《아이다 Aida》를 듣고나서부터 작곡가가 될 것을 결심, 1880년에 마르게리타여왕의 장학금과 그 밖의 후원으로 밀라노의 음악학교에 입학, 폰키엘리의 지도를 받았다. 재학 중 스승의 권유로 처녀작 《빌리 Le Villi》를 어느 현상에 내어 실패하였으나 리코르디출판사의 후원으로 상연되어(1884) 성공을 거두었다. 그후 잇달아 오페라를 발표하고 1893년 토리노에서 상연된 《마농 레스코 Manon Lescaut》로 그의 이름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96년 토스카니니 지휘로 《라보엠 La Bohème》을 상연, 성공을 거두고 1900년에는 로마에서 《토스카 Tosca》가, 1904년에는 밀라노에서 《나비부인 Madame Butterfly》이 초연되어 찬사를 받았다. 1907년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그 곳에서 제재를 얻은 《서부의 처녀 La Fanciulla, del West》가 1910년 뉴욕에서 초연되고 1918년에는 각각 내용이 전혀 다른 3부작 《외투 Il Tabarro》 《수도녀(修道女) 안젤리카 Suar Angelica》 《지안니 스키키 Gianni Schicchi》가 역시 뉴욕에서 상연되었다. 그후 《투란도트 Turandot》의 제작에 착수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투란도트》는 알파노에 의하여 완결되어 1926년 밀라노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상연, 대성공을 거두었다.

 

푸치니는 그 자신의 말대로 "극장을 위하여 작곡할 것을 신에게서 명령받은" 사람이었다. 그의 작품은 유려하고도 애절한 정에 넘치는 선율, 극장의 요청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 자신의 양식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호소력이 큰 대본의 선택 등에 의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는 여성 등장인물의 묘사에 뛰어나, 미미·토스카·나비부인·안젤리카 등에게 주어진 선율은 청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이 있다. 또한 《나비부인》 《투란도트》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국취미적인 제재를 즐겨 선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푸치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금자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베르디의 여러 작품의 뒤를 이어, 인간 목소리의 표현에 의한 황홀감을 추구하는 이탈리아의 전통을 딛고 서서 당시의 베리즈모(진실주의)의 물결에도 씻기고, 또한 만년에는 20세기의 새로운 수법도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이탈리아의 근대적인 오페라에의 길을 걸어간 작곡가였다. 작품에는 위에 든 오페라들 외에도 칸타타 《아리따운 이탈리아의 처녀들》, 관현악곡 《전주곡》, 그리고 실내악곡·가곡·오르간곡 등이 있다.

 

 

53. 레온카발로 (Ruggiero Leoncavallo 1858∼1919)

   

이탈리아 작곡가. 나폴리 출생.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8세에 나폴리음악원을 졸업했다. 오페라 작곡가를 지망하여 볼로냐대학에서 문학을 청강하면서 A. 비니의 비극 《차터톤(Chatterton, 1896)》의 오페라화를 시도했으나, 공연 직전 흥행사의 도피로 빚만 짊어졌다. 그 뒤 연주가로 여러 나라를 다녔고, 바그너로부터 격려를 받자 그를 본받아 대본 저작에 뜻을 품고 이탈리아 문예부흥기의 사실에 바탕을 둔 3부작 《황혼》에 몰두, 그 제1부 《메디치가(家)》를 완성했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Lusticana, 1890)》의 대성공에 자극을 받아 그와 같은 경향의 베리즈모 오페라 《팔리아치(Pagliacci)》를 작곡하여 1892년 5월 밀라노에서 공연, 결정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잇따라 공연한 앞의 두 작품은 실패로 끝났고, 그 후 푸치니와 같은 제재를 다룬 《라 보엠(La Bohème, 1897)》과 《자자(Zazà, 1897)》 등이 인정받았을 정도였다. 출세작이며 대표작인 《팔리아치》는 극중극(劇中劇)을 이용하여 연극의 희극과 현실에 있는 비극을 교묘하게 대조시킨 점, 가슴을 울리는 노래나 탁월한 관현악 효과 등 무대구성이나 극적 효과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4. 말러 (Gustav Mahler 1860∼1911)

 

  오스트리아 작곡가·지휘자. 보헤미아 출생.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주하였다. 1869년 김나지움에 입학, 1870년 최초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열었고, 프라하에 가서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875년 빈음악원에 입학, 피아노와 화성학을 공부하였다. 20세 때 최초의 대작인 독창·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한탄의 노래》를 완성, 1880년부터는 지휘자로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류블랴나·올로모우츠 등의 지방 오페라극장과 카셀·프라하·라이프치히·부다페스트 등의 오페라극장에서도 활동하여, 바그너와 모차르트를 레퍼토리로 삼는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그는 이 동안에 《교향곡 제1번》을 작곡했다. 1891년 함부르크시립오페라극장의 수석지휘자에 취임, 휼륭한 가수들과 바그너의 작품을 상연함과 동시에 함부르크관현악단 무대에서도 수많은 교향곡을 다루었다. 이 시기부터 작곡가로서의 활동도 본격화하였고, 1893년 여름 이후 슈타인바흐에서 《교향곡 제2번 부활》 《교향곡 제3번》 등을 작곡했다. 1897년에는 빈궁정오페라극장·빈필하모니의 수석지휘자가 되어, 바그너와 모차르트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참신한 연출과 무대장치로 오페라상연을 하였기 때문에 대지휘자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1902년 무명의 여성 작곡가와 결혼하였다. 아내의 도움으로 더욱 힘을 얻은 그는 벨터호반의 마이어니히에 작곡오두막을 만들어놓고 《교향곡 제6번 비극적(悲劇的)》 《교향곡 제7번 밤의 노래》 《교향곡 제8번 천인(千人)의 교향곡》 등의 대작을 완성하였다. 1907년 반유대주의세력에 협공당하자 빈궁정오페라극장을 떠날 결심을 굳히고 뉴욕으로 출발, 그곳에서 메트로폴리탄오페라극장과 뉴욕필하모니의 지휘자로서 연주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휴가철인 봄부터 여름에 걸쳐서는 매년 유럽으로 돌아가, 이탈리아 국경에 가까운 어느 산장에서 말년의 걸작인 6악장의 독창부(獨唱附) 교향곡 《대지(大地)의 노래》와 《교향곡 제9번》 《교향곡 제10번(미완성, 1924년 초연)》을 작곡하였다. 5회에 걸쳐 두 대륙을 오갔던 말러는 과로로 인해 1911년 2월 21일 뉴욕필하모니의 콘서트 후에 쓰러져, 연쇄상구균성 인후폐렴을 치료할 겸 요양을 위하여 파리를 경유, 빈으로 되돌아갔으나 그곳에서 그해 5월 18일 51세로 죽었다. 20세기 작곡기법의 선구자로서, 말러의 10곡에 이르는 교향곡은 빈고전파(古典派)의 전통에 의거함과 동시에 그 전통을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평가하여 참신한 음악적 세계를 개척, A. 쇤베르크 등의 신(新)빈악파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55. 드뷔시 [Achille Claude Debussy, 1862.8.22~1918.3.25]

 

요약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의 개성적인 양식은 현상적으로는 선법에 의거, 음색적인 계기를 뚜렷이 표면에 내세워 바로크 후기 이후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기능화성법에 의한 고전적 조성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주제법·율동법 분야에도 점차 혁신을 가져오게 했다.

 

본문

파리 근교 출생. 어려서 양친을 따라 파리로 나와 1871년 칸에 사는 고모의 주선으로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시인 베를렌의 숙모 모테 부인에게 정식 레슨을 받았으며, 그 덕택으로 1872년 가을 파리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1884년 칸타타 《방탕한 아들》로 로마대상을 받았으며, 졸업할 때까지 솔페즈 부문에서 1등상, 피아노 부문에서 2등상, 피아노 반주과에서 1등상 등을 받았으나, 화성법에서는 관습적인 규범에 반발한 이유로 아무 상도 타지 못하였다.

 

한편, 학비를 벌기 위해 여름방학 동안 폰메크 부인의 피아노 반주자로 3년간 러시아와 유럽 각지를 여행, 감수성과 취미를 기르고 바니에 부부와 알게 되어 교양을 쌓았으며, 바니에 부인을 영감을 주는 여성으로 받들어 《만돌린》(베를렌의 시)과 그 밖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로마 대상의 로마 의무 체류기간 2년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왔다. 로마 유학시절의 작품에는 《봄》과 《선택받은 소녀》(프랑스어로 번역된 로제티의 시에 의함) 등이 있는데, 실제로는 거의 파리에서 작곡된 《선택받은 소녀》는 1893년에 초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겨울에는 《현악 4중주곡》, 이듬해 겨울에는 출세작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등 걸작품을 계속해서 발표하였으며, 그 무렵까지 몇 해 동안은 전에 열중했던 바그너에 대한 비판과 무소르크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와 가믈란음악의 계시, 말라르메, P.루이스 등 상징파 시인들과의 교우 등이 그의 미학과 작풍의 발효를 촉진시켰다.

 

베를렌의 시세계와의 접촉(가곡집 《화려한 잔치 제1·2집》 등)도 마찬가지 뜻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그 후 앞서 말한 《현악4중주곡》 및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에서 《빌리터스의 노래》(루이스의 시)와 모음곡 《피아노를 위하여》, 관현악을 위한 《녹턴》을 거쳐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1893∼1903)의 완성에서 초연에 이르는 10년간은 드뷔시의 개성적인 양식이 확립·확인된 시기에 해당된다.

 

그 양식은 단적으로 말해서 현상적(現象的)으로는 선법(교회선법·온음음계 등)에 의거, 음색적인 계기를 뚜렷이 표면에 내세움으로써 바로크 후기 이후 오랫동안 지배적이었던 기능화성법에 의한 고전적 조성(調性)을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주제법(主題法)·율동법 분야에도 점차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음색적 계기를 인상적 계기와 동일시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자주 불려오고 있듯이 인상파의 음악이지만, 이 감각과 이미지(영상)의 음악은 음악학자 쿠르트도 지적한 바와 같이 “수단으로서 가장 현저하게 음향감각적인 것을 두드러지게 하고 있으나 시종 음향을 초월한” 예술로 상징파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양식을 대표하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초월한 보다 새로운 차원에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1905년에 작곡된 관현악곡 《바다》는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를 한걸음 더 앞선 작품이다. 《바다》와 그 전후에 작곡된 피아노곡집 《판화(版畵)》, 《영상 1》, 《영상 2》에 의하여 그의 원숙기가 전개되었다. 이것은 피아노모음곡 《어린이의 세계》와 관현악을 위한 《영상 3》(《이베리아》 포함), 가곡집 《프랑스와 비용의 시에 의한 3개의 발라드》, 피아노곡 《전주곡집 1》 등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 후 《전주곡집 2》, 신비극 《성 세바스티안의 순교》와 함께 만년의 자기 완성시기로 들어갔으며, 그것은 다시 새로운 음향형식을 발견하려는 흔적이 엿보이는 발레곡 《유희》, 피아노곡 《12의 연습곡》, 프랑스적 고전주의를 지향하는 3곡의 《소나타》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자기 경신(更新)을 계속 꾀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끊임없는 경신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에 걸쳐 음악사의 진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파리에서 암으로 생애를 마쳤다.

 

 

56. 마스카니 [Pietro Mascagni, 1863.12.7~1945.8.2]

 

이탈리아의 작곡가. 순회 오페라단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일하다가 뒤에 음악교사가 되어 체리뇰라에 정착했다. 그의 대표작《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함께 베리스모(진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토스카나주(州) 리보르노 출생. 리보르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1881년 오페라 《제사장(製絲場)에서》로 인정을 받았다. 그 후 밀라노음악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그만 두고, 순회 오페라단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 일하다가 뒤에 음악교사가 되어 체리뇰라에 정착하였다.

 

1889년 음악출판사의 현상모집에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가 1등으로 당선, 이듬해 초연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와 함께 베리스모(진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그 후에도 일본을 무대로 한《이리스》(1898) 등 10여 편의 오페라를 썼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해설

 

작가 베르가의 극을 번안하여 각색한 단막가극으로, 원작의 기분을 잘 살린 작시법(作詩法)은 이 가극에 귀중한 생명을 주고 있다.

1막이긴 하지만 막이 길어서 2장으로 나뉘며, 그 사이에 간주곡이 들어 있다. 초연은 1890년 5월 17일 로마의 코스탄틴 극장이었는데, 그날 밤 극장은 만원이었으며, 개막 전에 서사(序詞)로 유명한 「시칠리아나」가 불려지기 시작하자 청중은 순식간에 감격의 물결에 파묻혀 버렸다고 한다.

줄거리는 시칠리아섬에서 일어난 비극이다. 젊은 농부 투리두가 군대에 나간 동안, 연인 롤라는 마부 알피오와 결혼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투리두는 그것을 알자 돌연 산투짜라는 처녀를 사랑하지만, 그러나 또다시 옛날의 연인 롤라와 사랑을 속삭이게 된다. 이것을 알고 실망한 산투짜는 알피오에게 이 사실을 통고한다. 알피오는 투리두와 결투를 하여 그를 쓰러뜨리고, 산투짜는 스스로 빚은 실연에 고뇌한다.

전주곡과 시칠리아나 아름다운 가락의 전주곡은 가극의 주요 주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환상곡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시칠리아나」는 하프 반주로 주인공 투리두가 롤라를 찬양하는 세레나데로, 개막 전 무대 뒤에서 부른다.

간주곡 관현악과 오르간의 연주에 의한 간주곡은, 오늘날에는 독립해서 콘서트 프로그램을 장식하고 있다.

 

 

57. 슈트라우스 [Richard Georg Strauss, 1864.6.11~1949.9.8]

 

요약

독일 후기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 《살로메》 등의 오페라와 《돈 후안》 등의 교향시 등을 남겼다. 마이닌겐관현악단의 악장을 비롯하여 뮌헨 ·베를린 ·빈 등지의 각 오페라극장과 유명한 음악제에서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국적 독일

출생지 독일 뮌헨

주요작품 《돈 후안》(1889) 《살로메》(1905) 《장미의 기사》(1911)

 

본문

뮌헨 출생. 아버지 F.슈트라우스도 뛰어난 음악가로서 뮌헨 궁정관현악단의 제1호른 주자 겸 왕립음악학교 교사를 지냈다.

 

부모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는 11~16세 때까지 그곳 궁정악장(宮廷樂長) 마이어에게 사사하여 12세 때 《축제행진곡》(작품 1)을 작곡하고 13세 때는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바흐의 평균율(平均律)을 연주하였다 한다.

 

1882년~83년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쇼펜하우어에 심취하였다. 또 그 사이 자기의 작품을 가지고 빈 ·베를린 등지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뷰로와 사귀는 등 그의 재능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84년 《교향곡》(작품번호 12)이 뉴욕필하모니에서 초연되고, 같은해 뷰로의 뒤를 이어 마이닌겐관현악단의 악장에 취임,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브람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슈트라우스는 철저한 반(反)바그너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감화로 바그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후 점차 리스트와 바그너에 심취, 마침내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페라에서는 바그너보다 감미로우면서도 관능적인 선율로, 교향시(交響詩)에서는 리스트보다 자유로우면서도 광범한 내용 속에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87년에는 소프라노가수이자 자신의 가곡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가 된 파울리네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는 뮌헨 ·바이마르 ·베를린 ·빈 등지의 각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또 베를린필하모니와 빈필하모니의 지휘도 맡고, 잘츠부르크음악제를 비롯한 유명한 음악제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1908년 뮌헨 근교에 산장을 짓고 때때로 연주여행을 하는 이외에는 주로 그곳에서 음악 창작에 몰두하였다.

 

슈트라우스의 생애에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은, 만년에 그가 나치스정권에 협력한 결과가 된 몇몇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의 ·사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독일 후기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서의 공적은 부인할 수 없다.

 

주요작품으로는 《살로메:Salome》(1905) 《엘렉트라:Elektra》(1909) 《장미의 기사(騎士):Der Rosenkavalier》(11) 등 15개의 오페라, 《돈 후안 Don Juan》(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돈키호테 Don Quixote》(98)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99) 등을 비롯한 10곡의 교향시, 그리고 수많은 가곡과 약간의 실내악곡 등이 있다.

 

 

58. 시벨리우스 [Jean Sibelius, 1865.12.8~1957.9.20]

 

요약

핀란드의 작곡가로 민족적인 소재를 유럽풍인 지적 묘사로 처리한 작풍이 특징이다. 모교 헬싱키음악원의 교수를 지냈으며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를 비롯하여 《투오넬라의 백조》, 교향시 《핀란디아》등으로 명성을 떨쳤다.

 

본명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국적 핀란드

출생지 핀란드 헤멘린나

주요작품 《칼레발라》 《투오넬라의 백조》 《핀란디아》

 

본문

본명 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헤멘린나 출생. 9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5세 때부터는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배워 이 무렵부터 점차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은 음악가가 되려는 그의 희망을 반대하여 1885년 헬싱키대학에 입학, 법률을 전공하는 사이사이 헬싱키음악원에서 베겔리우스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그 후 음악을 전공하기 위하여 대학을 중퇴하고 당시 음악원 교수로 있던 명피아니스트 부조니에게 사사하였다.

 

시벨리우스는 본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뜻을 품었으나 무대에 서면 상기하는 성격 때문에 연주가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내성적인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1889) ·빈(90)에 유학하고, 빈에서는 브람스를 만나 가곡에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민족적인 소재를 통속적인 묘사에 빠지지 않고 유럽풍인 지적 묘사로 처리한 그의 작풍은 유학시절에 쌓은 지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92년 모교 헬싱키음악원의 작곡과 바이올린교수가 되고, 작곡면에서는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 의한 교향시 《크레르보》 《엔사가》, 모음곡 《칼레발라》 등으로 국외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투오넬라의 백조》를 비롯한 《4개의 전설》, 교향시 《핀란디아》 《제1교향곡》 등으로 명성을 얻고 1897년에는 국가에서 종신 연금을 주기로 하여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국외로의 연주여행도 많아졌으나, 《제2교향곡》을 완성한 1902년 전후부터 4년간은 귓병으로 고생을 하고 1904년에는 헬싱키 교외의 별장으로 옮겨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반 은둔생활을 하였다.

 

24년 《제7교향곡》, 이듬해의 교향시 《타피오라》 이후는 거의 작품이 없고, 뇌출혈로 91세의 생애를 마쳤다. 7개의 교향곡 외에도 많은 교향시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있고, 《핀란디아》 《투오넬라의 백조》 등이 특히 널리 알려졌다.

 

 

59. 라흐마니노프 [Sergey Rachmaninoff, 1873.4.1~1943.3.28]

 

요약

러시아의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20세기 초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었고 낭만파의 마지막 작곡가이기도 했다. 작풍은 ‘차이코프스키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일종의 회고적 경향을 띠고 있다.

 

원어명 Sergey Vasilyevich Rachmaninoff(Rachmaninov/Rakhmaninov)

국적 러시아

출생지 러시아 노브고로트

주요수상 글린카상(1901)

주요작품 《피아노협주곡 제2번》(1901) 《죽음의 새》(1906)

 

본문

노브고로트 출생.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고 그 후 페테르부르크 및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A.실로티에게 피아노를, S.I.타네예프와 A.S.아렌스키에게 작곡을 배웠다. 재학 중에 이미 작곡을 시작하여 졸업하던 해인 1892년에는 가극 《알레코》와 피아노곡 《전주곡(내림마단조)》을 작곡하였다. 졸업 후에는 스크랴빈과 더불어 스베리오프에게 사사하였다. 1893년 평소 사숙하던 차이코프스키가 죽었을 때는 《위대한 예술가의 회상》을 썼다. 1899년 런던에서 피아니스트 ·작곡가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얻고, 《피아노협주곡 제2번》(1901)으로 글린카상을 받았으며, 다시 드레스덴에서 교향시 《죽음의 섬》(1909)을 작곡하였다.

 

1909년 미국에 건너가 피아니스트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 귀국, 1910∼1917년 모스크바극장 및 마린스키극장의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연주활동과 작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패색이 짙어지자 모금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후 소련 당국의 권유로 귀국준비를 하던 중 발병하여 사망하였다. 20세기 초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의 한 사람이었으며, 《피아노협주곡》 제2번 및 제3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낭만파의 마지막 작곡가이기도 하였다. 작풍은 ‘차이코프스키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일종의 회고적 경향을 띠고 있다. 작품으로는 피아노곡을 비롯하여 관현악곡 ·가곡 ·합창곡 ·오페라 등 많은 곡들을 남겼다.

 

 

'일반 > 노래의 날개 위에(감상,기악)' 카테고리의 다른 글

4. H. V. Karajan Best Classsic CD Collection  (0) 2013.01.27
3-6) 20세기 음악  (0) 2013.01.27
3-4) 초기 낭만주의  (0) 2013.01.27
3-3) 고전주의(Classic)  (0) 2013.01.27
3-2) 바로크 음악  (0) 2013.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