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귀나무
(Albizzia julibrissin Durazz. (영) Silk Tree, Silk Flower (일) ネムノキ (漢) 合歡樹<합환수>, 合婚樹<합혼수>, 夜合樹<야합수>, 有情樹<유정수>)
자는데 귀신같은 나무라면 어떨까?. 그냥 만든 이름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노점판에서 흔히 팔고 있는 신경초란 풀을 건드리면 금새 오무라드는 것을 본 경험이 있는가? 자귀나무는 미모사(Mimosa, 신경초)와 모양이 비슷하며 밤이 되면 증산작용을 줄이기 위하여 소엽이 서로 마주보기로 붙어 버린다. 재미있는 것은 50-80개나 되는 소엽이 항상 짝수가 되어 서로 붙었을 때 짝이 없는 소엽이 남지 않은다. 따라서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는 뜻으로 심기도하며 합환수(合歡樹)라고도 한다. 또 콩꼬투리처럼 생긴 긴 열매는 겨울에 바람이 불면 서로 부딪쳐서 꽤나 시끄러우므로 옛 사람들은 여설수(女舌樹)란 이름도 붙여 두었다. 자귀나무 껍질은 합환피(合歡皮)라 하여 동의보감에 보면 <오장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근심을 없애서 만사를 즐겁게 한다>고 한다.
황해도 이남에 주로 자라는 낙엽활엽수 소교목으로 높이 3∼5m에 달한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짝수2회 우상복엽이며 소엽은 길이 1cm, 너비 3∼4mm정도에 불과하여 매우 작다. 작은 가지 끝에서 5cm 정도의 꽃자루가 자라서 15∼20개의 꽃이 우산모양으로 달리며 연분홍 빛으로 아름답다. 흰 꽃도 있다. 9∼10월에 콩깍지 같은 긴 열매가 익으며 길이 15cm정도의 편평한 꼬투리에 5∼6개의 종자가 들어 있다. 줄기가 굽거나 약간 드러눕는 모양이어서 목재로서의 큰 가치는 없고 나무 껍질은 한약재로 이용된다. 관상수로서 정원, 공원에 적당하고 콩과식물이므로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자두나무
열매가 진한 보라색이고 모양이 복숭아를 닮았다하여 자도(紫桃)라 하다가 자두가 된 것이다. 순수 우리말 이름은 오얏이고 한자명은 이(李)이다.
옛 사람들은 복숭아와 함께 봄에는 오얏 꽃을 감상하면서 시 한수 읊조리고, 여름에 들면서 익은 열매를 따먹는 과일나무로서 모두의 사랑을 받아왔다.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사서(史書)에는 꽃피는 시기로 이상기후를 나타내는 기록이 여러번 있으며 동국이상국집에 시가(詩歌)로 실린 것만도 20여회나 된다.
자두나무는 본래 우리나라에 자라던 나무가 아니고 삼국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가져다 심은 수입나무이다. 시경(詩經)에 보면 중국에서도 주나라 시대에는 꽃나무로서 매화와 오얏을 으뜸으로 쳤다 한다.
옛말에 오해를 받기 쉬운 일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이란 말을 쓴다. 즉 오얏의 열매가 달린 나무 아래서는 갓을 고쳐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만큼 오얏 밭은 우리 주변에 흔하였으며 남에게 조금도 의심 살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선비의 꼿꼿한 마음가짐을 내보이기도 한다.
고려 건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도선국사는 그의 예언서 도선비기(道詵秘記)에, 500년 뒤 오얏 성씨(李)를 가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고려 중엽이후는 한양에 오얏나무를 잔뜩 심고 일정기간이 지나면 베어버림을 반복함으로써 왕기(王氣)를 다스렸다 한다. 그러나 이런 조치의 보람도 없이 이성계가 이룬 조선왕조는 500년의 영화를 누리게 된다.
조선왕조가 특별히 오얏나무를 왕씨의 나무로서 대접한 적은 없으나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는 오얏 꽃은 왕실을 대표하는 문장(紋章)으로 사용하였다. 1884년 우리 역사상 최초로 시작된 우정사업은 1905년 통신권이 일본에 빼앗길 때까지 54종의 보통우표를 발행하게 된다.
이 보통우표에는 이왕가(李王家)의 문장인 오얏과 태극이 주조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화우표(李花郵票)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의 백동으로 만든 화폐에도 표면의 위쪽에는 오얏꽃, 오른쪽에는 오얏나뭇가지, 왼쪽에는 무궁화의 무늬를 새겨 넣었다.
명나라의 서광계(徐光啓.1562-1633)가 지은 농정전서(農政全書)에 의하면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나 보름날에 오얏나무의 가지 틈에 굵은 돌을 끼워 두면 그 해에 과일이 많이 열린다고 하는 '나무 시집보내기' 풍속이 있었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대추나무를 대상으로 시집보내기를 한다. 인가 부근에 과일나무로 심고 있으며 줄기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커다란 낙하산모양을 이룬다. 잎은 달걀크기로 어긋나기하고 끝이 차츰 좁아지며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봄에 새하얀 꽃이 잎보다 먼저 피며 보통 3개씩 달린다. 열매는 둥글고 밑 부분이 약간 들어간 모양으로서 여름에 자주빛으로 익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자두는 대부분 개량종이고 진짜 중국원산의 옛 오얏은보기 어렵다.
자작나무
(Betula platyphylla var. japonica Hara (영) Birch (일) シラカンバ (漢) 樺<화>, 白樺<백화>, 白檀樹<백단수>, 白樹<백수>, 沙木<사목>)
지금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대부분 5∼60년대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뒷산에서 산울림으로 들려오는 장끼의 울음을 뒤로하고 키보다 두 배나 높은 나무 한 짐쯤은 지고 내려와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며 이 때에 흔히 보아온 나무가 소나무 아니면 참나무일 것이다. 그러나 고향을 북한의 깊은 산골에 두신 분들은 유별나게 새하얀 껍질을 가진 나무를 기억 속에 영 지울 수가 없을 것이다. 나무의 수피는 시커멓고 울퉁불퉁하거나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유독 자작나무만은 하늘을 날던 천사가 차디찬 겨울의 산 속에 처절하게 서 있는 자작나무를 불쌍하게 여겨 흰 날개로 나무의 등걸을 칭칭 둘러쌓은 것 같은 흰 수피를 가진 나무이다.
언뜻 짐작이 안 간다면 닥터지바고나 차이코프스키 같은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시기 바란다. 광활하게 펼쳐진 설원에 간간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와 의연히 맞서서 쭉쭉 뻗은 늘씬한 몸매와 하얀 피부를 한껏 자랑하는 나무 미인들의 군상이 바로 자작나무이다. 눈이 얼어붙어 흰 껍질이 된 것이 아니고 숲 속의 정한수만 먹고 고고히 자란 기품을 뽐내듯이 어디에서나 새하얀 수피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자작나무는 화(樺) 또는 백화(白樺)라고 한다. 높이 20m, 지름 1m까지 자랄 수 있는 큰 나무이며 기온이 영하 2∼30℃씩 떨어지는 추운 지방의 대표적인 나무이다. 현재 남한에는 자작 나무가 자연 분포하는 지역은 없으며 가로수로 심고 있는 자작나무는 수입된 자작나무가 대부분이다.
자작나무는 우선 흰 껍질의 특성을 살린 쓰임새와 나무로서 쓰임새가 있다. 흰 껍질은 얇은 종이를 여러겹 붙여놓은 것처럼 차곡 차고 붙어있다. 한 장 한 장이 매끄럽고 잘 벗겨지므로 종이를 대신하여 불경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영어 이름 birch는 그 어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글을 쓰는 나무껍질이란 뜻이 있다한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종류의 껍질을 펴서 그린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은 기름기가 많아 잘 썩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을 붙이면 잘 붙고 오래가므로 화혼(華婚)이나 화촉(華燭) 등 남녀의 만남과 연관된 이름은 껍질의 불타는 성질과 관련이 있다. 나무이름은 껍질이 탈 때 <자작 자작>소리가 난다는 데서 따온 의성어이다.
나무는 껍질만큼이나 나무속도 거의 황백색으로 깨끗하고 균일하며 옹이 하나 없어 북부 지방의 서민들은 이 나무를 쪼개어 너와집의 지붕을 이었으며 죽으면 껍질로 싸서 매장하였다 한다.
또 이른 봄이 되면 고로쇠나무, 거제수 나무와 마찬가지로 줄기에 구멍을 뚫어 위로 올라가는 생명수를 인간에게 뺏기고도 의연히 서 있어서 흰 수피 때문에 다가오는 처량함과 아울러 생명의 경외마저 느끼기 도 한다. 지금까지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재는 자작나무로 알려져 왔으므로 필자의 상상에는 고려인들은 참 멋쟁이 라는 생각을 하였다. 몽골의 말발굽에 온 나라가 유린당하는 처절함 속에서도 비록 인쇄하느라 시커먼 먹물을 뒤집어 쓰겠지만 부처님 말씀을 한 자 한 자 새겨 넣을 때는 깨끗하고 고상한 나무만을 베어다 쓴 마음의 여유를 갖다니!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대장경을 새겨 넣은 나무는 대부분이 산벚나무와 돌배나무 이었다.
추운 지방에 자라는 낙엽활엽수 교목으로 나무높이 20m에 이르고 강원도 이북에 자생한다. 나무 껍질은 흰빛으로 얇은 종이처럼 벗겨진다. 잎은 삼각상 달걀모양이고 이빨모양의 크다란 단거치나 혹은 복거치가 있고 측맥은 6∼8쌍 정도이다. 꽃은 암수 한 나무로서 4∼5월에 피며 암꽃은 위로 서고 수꽃은 이삭모양 으로 아래로 처진다. 열매는 9월에 익으며 아래로 처져 달리고 열매의 날개가 종자의 폭보다 넓다.
조팝나무
(Spiraea prunifolia var. simpliciflora Nak. (영) Bridal Wreath (일) ヒトエノシジミバナ (漢) 繡線菊<수선국>, 常山<상산>)
꽃이 피어 있는 모양이 조로 지은 밥과 비슷하다 하여 조밥나무가 조팝나무로 된 것이다. 조그마하고 새하얀 작은 꽃이 잎보다 먼저 지천으로 무리 지어 피므로 조밥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이른 봄 아직 깊은 산에는 잔설이 남아 있을 때 하얀 꽃이 피므로 얼핏보면 눈이 덮인 것 같다.
전국에 걸쳐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높이 1∼2m까지 자라며 여러 개의 줄기가 올라와 포기를 만든다. 어린 가지는 갈색으로 털이 있으며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타원형으로 길이 2.0∼3.5cm이고 첨두, 예저로서 가장자리에 잔톱니가 있다. 꽃은 짧은 가지에서 나온 산형화서에 4∼6개씩 달리며, 4∼5월에 잎이 나오기 전 흰빛 꽃이 가지마다 지천으로 달린다. 열매는 골돌로서 9월에 익는다.
쥐똥나무
(Ligustrum obtusifolium Sieb. et Zucc. (영) Ibota Privet, Border Privet (일) イボタノキ (漢) 女貞<여정>, 水蠟樹<수랍수>)
가을에 익는 새까만 열매가 색깔이나 크기가 쥐의 똥과 흡사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물망초, 에델바이스 등 다른 나라의 식물은 좋은 특징을 살려서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는데 우리는 왜 하필이면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쥐. 그것도 모자라 쥐똥과 비유하였느냐고 이름에 대한 시비가 많다. 우리 나라의 식물이름에도 물푸레나무, 수수꽃다리, 까마귀베개 등 찾아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얼마든지 있으니 실망할 필요는 없으나 쥐똥나무는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다행히 북한에서는 검정알나무라하여 우리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고 있다. 통일이 되면 북한 이름으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생울타리용으로 흔히 심는다. 전국에 걸쳐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나무높이 3m정도에 이른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긴 타원형이고 톱니가 없다. 꽃은 암수 한 나무로 5∼6월에 피며 새 가지 끝에 총상화서로 흰 꽃이 뭉쳐 피고 짙은 향기가 오래도록 난다. 열매는 10월에 검은빛으로 익는다.
진달래
(Rhododendron mucronulatu Turcz. (영) Korean Rosebay, Korean Rhododendron (일) ゲンカイツツジ (漢) 杜鵑花<두견화>)
봄이 되면 우리 나라의 야산은 온통 붉은 진달래꽃으로 뒤덮인다. 그 붉음이 진하여 핏빛과도 비유된다. 진달래는 다른 이름으로 두견화(杜鵑花)라고도 하는데 진달래의 붉은빛이 두견새가 밤을 꼬박 새우고 울어대어 피를 토한다는 전설에 유래된 것이다. 따라서 진달래는 사랑의 노래나 시에 단골로 등장한다. 고려사에 보면 충렬왕6년(1280) 3월 병진일 왕이 궁전 뒤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사운시(四韻詩) 1편을 짓고 사신(詞臣) 백문절, 반부, 곽여, 민지 등 18명으로 하여금 화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옛 사람들도 진달래를 두고 시를 읊조렸던 모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정시인 김소월의 대표 시에 <진달래꽃>이란 시가 있다.
전국 어디에서나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높이2∼3m정도이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긴 피침형이며 양면에 털이 드문드문 있고 약간 광택이 난다. 꽃은 가지 끝의 측아에 1개씩 달리나 때로는 2∼5개씩 꼭대기에 나며 붉은 자주빛으로 4월에 잎보다 먼저 핀다. 열매는 삭과로서 10월에 익는다.
철쭉
(Rhododendron schlippenbachii Maxim. (영) Smile Rosebay, Royal Azalea (일) クロフネツツジ (漢) 척촉<척촉>)
철쭉은 한자로 '척촉'이라고 하는데 철쭉 척 자에 머뭇거릴 촉 자를 쓴다고 한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가 자꾸 걸음을 멈추어 이런 이름이 생겼다하며 산객(山客)이란 이름도 같은 맥락에서 생긴 이름이다. 내가 자라던 경상북도 청도 지방에서는 진달래를 참꽃이라 하여 어린시절 꽃잎을 따먹기도 하였는데 철쭉은 연달래라 하여 먹으면 죽는다고 '선배 어린이'들로부터 단단히 교육을 받았다. 임학을 공부하면서 철쭉 꽃잎에는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옛 사람들의 경험과학에 감탄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전을 보면 철쭉과 관련된 재미있는 수로부인(水路婦人)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철쭉 설명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영산홍(暎山紅)이야기이다. 일본인들이 철쭉을 가지고 오랫동안 개량하고 육종하여 사쓰끼철쭉, 기리시마철쭉 등 여러 가지 꽃 모양과 색깔을 가진 수백 가지 품종을 만들었는데 이를 모두 합쳐서 영산홍이라 한다. 일본철쭉이란 이름이 맞는 말이나 영산홍이 더 많이 쓰이고 있는 이름이다. 4∼5월에 걸쳐 무릎높이 남짓한 작은 키에 여러 가지 색깔의 꽃이 무더기로 달리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정원수의 가장 대표적인 꽃나무가 되어 버렸다. 영산홍은 일찍 고려때 벌써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왕조때는 제법 널리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문헌에 실린 영산홍이 오늘 날의 일본철쭉과 같은 나무인지는 논란이 있다. 영산홍이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이후의 일이며 어디까지나 일본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일본의 꽃이다. 따라서 심어서는 안될 장소-예를 들면 고사찰의 대웅전 앞, 심지어 이순신장군의 사당이 있는 한산도의 제승당, 울릉도 도동에 있는 독도박물관 등 분별없이 심겨져 있는 것을 보면 심한 거부 반응을 느낀다. 어떤 이는 나무마저 국수주의적 발상을 한다고 비판할지 모르나 우리의 전통이 있는 곳에는 우리 나무와 우리꽃으로 꾸며야 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전국에 자라는 낙엽활엽수 관목으로 높이 2∼5m 정도이다. 잎은 어긋나기하지만 가지 끝에서는 5개씩 모여나기하고 넓은 거꾸로 세운 달걀모양으로서 톱니가 없다. 표면은 초록빛으로 처음에는 털이 있으나 차츰 없어지며 뒷면은 연한 초록빛으로 잎맥 위에 털이 있다. 꽃은 가지 끝에 3∼7개씩 달리며 잎과 함께 5월에 피고 색깔은 연분홍 빛이다. 열매는 긴 타원형이고 삭과로서 선모가 있으며 10월에 익는다.
측백나무
측백(側栢)이란 잎이 옆으로 자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본초강목에서는 밝히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고 납작한 비늘모양의 잎이 나란히 포개져 있어서 보통 침엽수와는 다르다. 꼭 옆으로 자란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측백이란 이름이 나무의 잎 모양과 어울린다.
측백나무의 고향은 어디일까. 약간의 논란이 있다. 중국이라는 주장과 우리나라에도 본래부터 자라던 나무라는 주장이 맞선다. 대체로 심지 않았는데도 자연적으로 자라면 그 지방을 나무의 고향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측백나무가 거의 절벽에 붙어 자라는 것을 두고 몇 몇 일본인 학자들은 '위쪽의 묘지에 심어둔 나무의 종자가 떨어져 사람이 갈 수 없는 절벽에 숲을 이루게 되었지만 본래는 중국 원산의 나무이다'고 주장한다.
이런 애매한 논란에는 순수한 학문적인 접근보다는 때로는 약간의 감정이 끼게 마련이다. 어느 쪽이 맞는 지는 하느님과 혹여 자기의 족보를 잘 외우고 있는 '양반 측백나무'밖에 아는 이가 없다.
중국의 주나라 때 임금의 능에는 소나무, 왕족의 묘에는 측백나무를 둘레나무로 심도록 하여 소나무 다음으로 대접받는 나무이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영조대왕의 묘지문(1776)에는'장릉(長陵)을 옮겨 모신 뒤에 효종께서 측백나무의 씨를 옛 능에서 가져다 뿌려 심으셨으니, 또한 임금의 효성이 끝이 없다'하여 묘소의 둘레나무로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심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측백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선비의 절개와 고고한 기상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나무다. 중종 34년(1540) 전주 부윤 이언적이 올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상소문에 '군자는 소나무나 측백나무 같아서 홀로 우뚝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지만, 간사한 사람은 등나무나 겨우살이 같아서 다른 물체에 붙지 않고는 스스로 일어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는 이덕유가 당나라 무종에게 올린 고사를 인용하여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측백나무에 비유하여 간한 것이다.
측백나무는 석회암지대에 회양목과 같이 자라는 경우가 많으며 아름드리로 크게 자랄 수 있는 늘 푸른 침엽수이나 대부분은 관목처럼 자란다. 나무 껍질은 길게 세로로 깊게 갈라지고 회갈색이다. 줄기에 혹 같은 이상조직이 잘 발달하고 줄기도 울퉁불퉁한 경우가 많다. 가지가 옆으로 벌어지는 일반 나무들과는 달리 거의 수직으로 발달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람이 늦고 나이를 먹으면 줄기가 잘 썩어버려 나무 자체로 쓰임새는 별로 없고 예로부터 향교나 양반집의 정원 및 생울타리 등으로 흔히 심었다.
대구시 동구 도동 향산의 측백수림은 천연기념물 1호다. 모두가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문화정책에도 불구, 1호가 지방에 있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이곳은 조선초기의 문신 서거정(1420~1488)의 사가집(四佳集)에 실린 대구십경 중의 하나인 제6경으로서 북벽향림(北壁香林)이란 제목의 시가가 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옛 벽에 푸른 향나무(측백나무) 창같이 늘어섰네/사시(四時)로 바람 곁에 끊이 잖는 저 향기를 /연달아 심고 가꾸어 /온 고을에 풍기게 하세'라고 번역하였다.
설악산과 오대산 등 높은 산의 꼭대기에는 아예 누워서 자라는 눈측백이있다. 또 가지가 사방으로 퍼지며 향기가 있고 잎이 넓은 서양측백은 미국에서 들여와 정원수로 심고 있다.
층층나무
뙤약볕이 내려 쪼이는 한여름의 등산은 숲이 우거진 계곡을 타고 올라가 산마루를 넘어 다시 계곡으로 넘어가는 길을 잡는다. 산마루에 앉아 시원한 솔바람으로 땀방울을 날려보내면서 넘어온 계곡을 내려다보면 가지가 층층으로 달려있는 나무가 우뚝우뚝 솟아있다.
한 마디마다 규칙적으로 가지가 돌려가면서 가지런한 층을 이루어 옆으로 뻗기 때문이다. 이름하여 층층나무이다. 그냥 '층층이', 아예 계단나무라고도 한다. 모양새가 너무 독특하여 한번 보면 잊어버릴 염려가 없다.
전국에 걸쳐 흔히 자라는 낙엽활엽수 큰 나무로서 키가 20m, 지름이 한아름에 이르기도 한다. 키의 자람이 주위의 다른 나무보다 훨씬 빠르고 쑥쑥 올라오면서 가지가 넓게 퍼진다. 혼자서 태양광선을 독차지하겠다는 놀부 심보를 가진 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나무를 '숲 속의 무법자'란 뜻으로 임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름도 섬뜩하게 폭목(暴木)이라 부른다.
층층나무는 소나무와 전나무처럼 저희들끼리 모여 떼거리로 자라는 법이 없다. 제살 뜯어 먹기 식 동족(同族)간의 경쟁을 피하고 다른 나무를 제압하려니 외톨이로 한 나무씩 자라야 경쟁에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영특함이 얄밉다.
숲 속의 나무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우리 인간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이런 얌체 녀석들은 그리 흔치 않고 대부분의 나무들은 적당히 경쟁하여 필요한 수분과 태양광선을 나누어 가지면서 사이 좋게 살아간다. 그 중에는 아예 일찌감치 경쟁을 포기하고 큰 나무에 가려진 음지의 환경을 나름대로 적응하는 나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늘에 살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박쥐나무는 작은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손바닥 만큼씩이나 되는 커다란 잎을 달고 있다. 어쩌다 잠깐 들어오는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보겠다는 몸부림이 너무 애처롭다.
층층나무의 어린가지는 겨울이면 붉은 빛이 강하다. 나무껍질은 지름이 거의 한 뼘이나 될 때까지는 갈라지 않고 매끄러운 회갈색이나, 나이를 더 먹어 가면 진한 회색의 얕은 세로 홈이 생기면서 갈라지고 때로는 흰 얼룩이 생기기도 한다.
목재는 안팎의 구별이 없이 연한 황백색이며 나이테가 잘 보이지 않고 나무질이 치밀하다. 이는 층층나무 목재의 물관이 크기가 일정하고 나이테마다 고루고루 분포하기 때문이다. 나무 세포가 모여 있는 상태가 글자를 새겨 넣기에 알맞다. 그래서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을 새기는데 산벚나무, 돌배나무와 함께 몇몇 경판재로 선택되는 영광을 갖기도 하였다. 요즘은 깨끗한 나무 속살의 특성을 살려 작은 나무인형을 만드는데 귀하게 쓰인다고 한다.
잎은 사촌나무인 말채나무나 산딸나무가 마주보기인 것과는 다르게 어긋나기로 달린다. 달걀모양이고 표면은 초록빛이며 뒷면은 흰빛으로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잎맥은 6-9쌍이고 잎자루는 붉은빛이 돈다. 늦봄에서 초여름에 걸쳐 햇가지 끝에 흰색이 도는 작고 편평한 우산 모양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열매는 둥글며 가을에 붉은빛에서 검은빛으로 익는다. 산새의 좋은 먹이가 된다
치자나무
(Gardenia jasminokde for. grandiflira Makino (영) Cape Jasmine (일) クチナシ (漢) 梔子<치자>, 黃梔花<황치화>)
열매는 치자라 하여 한방에서 이뇨, 지혈제 등의 약재로 쓰고 노랑색의 물감을 얻을 수 있어서 옷감의 염색, 각종 음식의 채색용으로 이용한다.
중국 원산으로 남부 지방에 심고 있는 상록활엽수 관목으로 높이 2∼3m까지 자란다. 잎은 마주나기하며 긴 타원형이고 잎자루가 짧다. 표면에 윤기가 있으며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꽃은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고 6월에 흰빛으로 피고 짙은 향기가 있다. 열매는 길이 3∼4cm 로서 긴 타원형이고 세로로 6∼7개의 능선이 있다. 9월에 누른빛을 띤 붉은색으로 익는다. 치자나무와 비슷하지만 잎과 꽃이 작고 꽃잎이 겹으로 된 것을 꽃치자(var. radicans Makino)라고 한다. 꽃치자의 향기는 너무 강하여 가까이서 맡으면 숨이 막힐 지경이라 은은한 향기를 즐기려면 멀리서 맡아야 한다
칠엽수(마로니에)
칠엽수의 또 다른 이름인 ‘마로니에(marronnier)’는 불란서가 연상된다. 파리 북부의 몽마르트 언덕과 센 강의 북쪽 강가를 따라 북서쪽으로 뻗어 있는, ‘낙원의 들판’이라는 뜻의 샹젤리제 거리의 마로니에 가로수는 파리의 명물이다. 그래서 ‘칠엽수(七葉樹)’란 이름이 어쩐지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은 마로니에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마로니에는 유럽이 고향인 ‘유럽 마로니에’를 말하고, 칠엽수란 일본 원산의 ‘일본 마로니에’를 가리킨다. 수만 리 떨어져 자란 두 나무지만 생김새가 너무 비슷하여 서로를 구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굳이 차이점을 말한다면 마로니에는 잎 뒷면에 털이 거의 없고, 열매껍질에 돌기가 가시처럼 발달해 있는 반면에 일본 칠엽수는 잎 뒷면에 적갈색의 털이 있고 열매껍질에 돌기가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거의 퇴화되었다. 꽃피는 계절인 6월초에 유럽여행을 해보면 온통 마로니에 천지다. 꽃 색깔도 우리가 보는 우유 빛 이외에 자주 빛 마로니에도 만날 수 있다.
긴 잎자루 끝에는 손바닥을 펼쳐 놓은 것처럼 일곱 개의 잎이 달리므로 ‘칠엽수’란 이름이 생겼다. 가운데 잎이 가장 크고 옆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져 둥글게 모여 있다. 길이가 한 뼘 반, 너비가 반 뼘이나 되며 가을에 노랗게 단풍이 든다.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역시 한 뼘 정도 되는 커다란 원뿔 모양의 꽃차례가 나오며, 꽃대 한 개에 100~300개의 작은 꽃이 모여 핀다. 질이 좋은 꿀이 많으므로 원산지에서는 꿀을 생산하는 밀원식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가을에는 크기가 탁구공만 한 열매가 달리며, 세 개로 갈라져 한두 개의 흑갈색 둥근 씨가 나온다.
이 열매는 유럽에서 옛날부터 치질․자궁출혈 등의 치료약으로 사용해 왔으며 최근에는 응용범위가 더욱 넓어져서 동맥경화증, 종창(腫脹) 등의 치료와 예방에도 쓰인다 한다. 열매의 영어 이름은 ‘horse chestnut’, 즉 ‘말 밤’이란 뜻이다. 원산지인 페르시아에서 말이 숨이 차서 헐떡일 때 치료약으로 쓰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는 이야기와 잎이 가지에 붙었던 자리(葉痕)가 말발굽 모양이라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서양칠엽수는 마취성분이 있어서 먹으면 정신이 몽롱해 지기도 하므로 함부로 먹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칠엽수는 밤처럼 생긴 씨속에 전분과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어서 가루를 내어 흐르는 물에 오랫동안 담가 두거나 심지어 잿물로 삶는 등의 과정을 거쳐 먹을 수 있다. 일본에서는 신석기시대부터 식용했다고 한다.
둘레가 두 아름 정도로 자랄 수 있을 만큼 크게 자란다. 나무속은 연한 황갈색으로 가볍고 부드러우며 작은 물관이 다른 나무보다 훨씬 많다.
우리나라에 마로니에가 들어온 것은 20세기 초 네덜란드 공사가 고종에게 선물한 것을 덕수궁 뒤편에 심은 것이 처음이며, 지금은 아름드리 거목으로 자랐다. 서울 동숭동의 옛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도 마로니에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1975년에 서울대가 관악구로 옮겨가면서 이 자리에 마로니에 공원을 만들고 동숭동의 대학로 일대는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이 나무는 엄밀한 의미에 마로니에가 아니라 일본 칠엽수다. 일제 강점기 때 심었다하며 나이가 많은 것은 80살이 넘었다.
시원시원한 잎과 마로니에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덧붙여져 서양인들은 그들의 노래에도 나올 만큼 좋아하는 나무다. 서양문화에 쉽게 가까이 가 있는 우리도 가로수, 공원 등에 널리 심고 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쳐 용인 민속촌에서 촬영한 역사극에 마로니에가 초가집 옆에서 웅장한 모습을 뽐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눈으로 보는 어울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무의 역사성도 고증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TV 사극(史劇)에 서양 사람이 양복을 입고 임금으로 분장하여 나온다면 온통 난리가 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무도 있을 자리에 알맞은 고증이 필요하다.
팽나무
팽나무는 느티나무, 은행나무와 함께 오래 살고 아름드리로 크게 자라는 정자나무로 유명하다. 늦봄에 자그마한 팽나무 꽃이 지고 나면 금세 초록색 열매가 달리고 가을에 가서는 붉은 끼가 도는 황색으로 콩알만한 크기로 익는다. 가운데에 단단한 핵이 있고 주위에 약간 달콤한 육질로 싸여 있어서 배고픈 옛 시골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왜 팽나무란 이름이 생겼을까. 옛 아이들은 초여름의 파란 팽나무 열매를 따 모아 작은 대나무 대롱의 아래위로 한 알씩 밀어 넣고 위에 대나무 꼬챙이를 꽂아 오른손으로 탁 치면 공기 압축으로 아래쪽의 팽나무 열매는 팽-하고 멀리 날아가게 된다. 이름하여 '팽총'이라고 하는데, 이에 쓰인 나무란 뜻으로 팽나무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팽나무에서 느끼는 어감은 날랜 토끼가 잡히고 나면 부리던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의 팽에 연관 지워지는 것이다. 한때 우리의 정치현실과도 맞아 떨어져 권력에서 밀려나기만 하면 흔히 '팽'당했다는 말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다.
어디에서나 잘 자라나며, 특히 바닷가 항상 소금바람이 부는 곳에도 끄떡없다. 그것도 두툼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수 백년이 되어도 울퉁불퉁하게 갈라지지 않는 얇고 매끄러운 껍질을 갖고 용케 버틴다. 곰솔과 함께 내염성(耐鹽性)이 강하여 바닷가에 심고 가꾸는데 가장 적합한 나무이다.
예천군 용궁면 금남리 금원마을 넓은 평야 가운데에는 내륙지방으로는 드물게 팽나무 노거수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김 아무개, 박아무개 하듯이 황목근(黃木根)이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신기해한다.
1948년 마을기금을 털어 827평의 논을 그 앞으로 등기해 주면서 이름이 필요하였다. 이 팽나무는 연한 황색 꽃이 피고 가을에는 노란 단풍이 들므로 '황'이란 성을 따고, 나무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목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98.99년도에는 연속하여 1만440원씩의 종합토지소득세를 부과하였는데 한 번도 지방세를 체납하지 않은 모범납세자(?)라 한다. 예천군에는 석송령과 함께 세금 내는 나무를 두 그루씩이나 가지고 있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며 전체모양은 타원형이고 작은 달걀크기 정도이다. 잎의 끝은 갑자기 짧고 뾰족해 진다. 잎맥은 톱니의 끝까지 뻗지 않고 휘어버리는 특징이 있으며 잎맥의 수도 3-4쌍 밖에 되지 않는다. 잎의 가장자리에는 약간 둔한 톱니가 있는데 잎 길이의 2분의 1 위쪽에만 톱니가 있는 것이 특징이고 톱니가 아래까지 내려오면 풍게나무라고 하는 다른 나무이다.
팽나무의 쓰임새는 운동구나 각종 기구를 만드는 정도이다. 남.서해안의 따뜻한 지방에만 자라며 팽나무의 사촌쯤 되는 푸조나무가 있다. 잎의 표면은 거칠고 뒷면은 짧은 털이 있으며 작은 잎맥은 7-12쌍으로 팽나무 보다 훨씬 많다. 잎 모양은 팽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잎맥이 톱니 끝 부분까지 닿는 것이 다르다.
피나무
배비장전은 위선적이고 호색적인 양반을 풍자한 조선후기 소설로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로도 잘 알려져 있다. 결코 여색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본처에게 장담하고 제주도로 떠났던 배비장이 그곳 기생 애랑에게 홀딱 반해 버린다.
애간장을 태우다 겨우 같이 잠자리에 들 무렵, 남편으로 위장한 방자의 호통에 놀라 피나무 궤짝 속으로 들어갔다가 발가벗고 동헌 마당에서 헛 헤엄치는 망신을 당한다. 이처럼 피나무의 주요한 쓰임새는 궤짝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궤짝 역시 대부분 피나무로 만들어졌다. 기록으로도 정조원년(1776) '피나무를 판목으로 쓰기 위하여 몰래 베는 일이 많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 외 불경을 얹어 두는 상(經床), 밥상, 교자상, 두레반을 비롯하여 산간지대에서는 굵은 피나무의 속을 파내어 독으로 쓰기도 하였다.
또 바둑판의 재료로도 유명하다. 비자나무나 은행나무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바둑돌을 놓을 때 표면의 탄력성과 연한 갈색이 바둑판의 재료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굵은 피나무는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 때에 모조리 잘려나가고 요즈음은 바둑판을 만들만한 굵은 나무가 거의 없어졌는데도 여전히 '피나무 바둑판'을 팔러 다니는 장수가 있다. 열대지방에서 나는 아가티스(agathis)란 나무로 만든 가짜 피나무 바둑판이 대부분이다.
피나무 껍질의 섬유는 질기고 길어서 밧줄이나 삿자리, 각종 농업 도구에서 어망까지 섬유자원으로 대단히 귀중하게 이용하였다. 피나무란 이름은 껍질(皮)을 쓰는 나무란 뜻에서 유래되었고 영어로도 basswood라 하여 같은 의미이다.
전국 어디에서나 잘 자라며 아름드리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나무 껍질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회갈색으로 세로로 얇게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넓은 달걀모양이며 크기는 어린아이 손바닥만하다. 모양새는 끝이 갑자기 뾰족해지고 아랫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간 예쁜 하트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예리한 톱니가 있다.
꽃은 초여름에 연한 노랑 빛으로 피고 향기가 강하며 많은 수술이 밖으로 튀어나와 독특한 꽃 모양을 이룬다. 꿀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꽃은 밤나무, 싸리 등과 함께 꿀을 따기 위한 밀원식물(蜜源植物)로 예부터 사랑 받아 왔다.
피나무는 열매가 달리는 모양이 너무나 이색적이다. 길이가 손가락 대여섯 마디쯤 되고 마치 헬리콥터의 날개를 닮은 긴 주걱 모양이다. 주걱의 가운데쯤에 굵은 콩알만하고 갸름한 열매를 가느다란 대궁에 매달고 있다.
이런 모양은 익은 다음 주걱과 함께 떨어졌을 때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한 피나무 선조의 혜안이다.
열매의 안에는 윤기가 반질반질한 새까만 열매가 들어 있다. 예부터 절에서는 염주를 만드는 재료로 귀하게 쓰여 왔고, 피나무의 잎 모양이 부처님이 도를 깨우친 인도보리수와 매우 비슷하여 절에 심겨진 피나무는 대부분 '보리수'로 알려져 있다.
피나무라고 불리는 무리에는 우리나라만 하여도 9종이나 있는데, 너무 비슷하여 일반인이 그 종류를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함박꽃나무
꽃 모양이 한약재로 널리 쓰이는 작약, 즉 함박꽃과 너무 비슷하여 나무에 피는 '함박꽃'이란 뜻으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함박꽃나무와 목련(木蓮)은 식물학적으로도 한 식구이고 꽃이나 잎 모양이 매우 닮았으며 주로 산 속에 자라므로 흔히 함박꽃나무는 산목련이라고도 부른다.
북한의 국화는 진달래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 함박꽃나무, 그들의 이름으로는 목란(木蘭)임이 알려졌다. 목란은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던 시절에 처음 발견하였으며 이름도 없었는데 60년대 후반 직접 목란이란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한다.
그 이후 목란은 귀중한 나무로 취급받았으며 91년 4월에 공식적으로 국화로 지정했다. 김일성 저작집 16권에도 '우리나라에 있는 목란이란 꽃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향기도 그윽하고 나뭇잎도 보기가 좋아서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하여 심기를 장려한 것 같다.
김일성과 연관이 있는 북한의 대형 건축물에는 대부분 목란꽃 문양이 들어있다. 금수산 의사당 밑바닥, 혁명사적지를 비롯하여 95년 8월에 판문점 북측지역에 세워진 김일성의 친필비석에도 그의 사망 당시 나이를 상징하는 82송이의 목란꽃이 새겨져 있다 한다.
또 각종 공문서의 바탕에는 우리나라가 무궁화 그림을 넣는 것처럼 목란꽃이 연하게 깔려있고, 평양 창광거리에서 최고시설을 자랑하는 종합연회장도 목란관이다. 가극 '금강산의 노래'에서도 목란은 꽃 중의 꽃으로 숭상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처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은 신격화의 일단일 따름이고 산목련, 함백이, 개목련, 함박꽃나무란 이름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나무이다. 자라는 곳이 인가 근처가 아니라 깊은 산 계곡이므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따름이다.
목란이란 원래 목련의 다른 이름으로 불려 왔으나, 이제는 북한이 이미 붙여둔 이름이니 함박꽃나무와 함께 사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목련은 꽃이 먼저 핀 다음 잎이 나오나 함박꽃나무는 잎이 다 펼쳐진 다음 꽃이 핀다. 꽃은 늦봄에서 초여름에 새 가지 끝에 달리며 6장의 하얀 꽃잎으로 둘러 쌓인 수술은 붉은 빛을 띤 보라색이다. 자칫하면 크다란 초록색 잎사귀에 묻혀 심심해져 버릴 하얀 꽃에 악센트를 주며 꿀을 따는 벌을 위하여 은은한 향기도 내뿜는다.
꽃은 당당하게 하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소곳이 땅을 향하여 피는 모양은 소복 입은 청상과부의 조심스런 몸가짐에서 풍기듯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이다.
전국의 산골짜기 숲 속에 자라는 작은 나무로서 키가 7-10m, 굵기는 발목 굵기 정도가 고작이다. 줄기는 여러 포기가 나와 비스듬하게 자라는 경우가 흔하고 껍질은 회색이며 갈라지지 않는다. 잎은 어린아이 손바닥만하고 감나무 잎처럼 생겼으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호랑가시나무
세상만물은 생김새가 특별하면 금새 눈에 띠게 마련이다. 호랑가시나무는 잎 모양이 제멋대로 생겼다. 흔한 나뭇잎으로 상상할 수 있는 갸름한 잎 모양은 너무 심심하다고, 긴 오각형에서 육각형으로 모서리마다 튀어나와 정말 괴상하게 생긴 잎을 만들었다. 피카소 그림을 보는 듯도 하고 유치원 아이가 서툰 가위질로 아무렇게나 잘라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가죽 같은 두툼한 두께에 구석마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발달하여 있다. 얼마나 날카롭던지 호랑이 발톱과 비유되고, 호랑이가 등이 가려우면 이 나무의 잎에다 문질러 댄다는 의미에서 호랑가시나무가 되었다. 그 외 고양이새끼의 발톱 같다하여 묘아자(猫兒刺), 회백색의 껍질을 두고 중국에서는 구골목(狗骨木)이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괴상하게 생긴 잎은 어릴 때나 새로 나온 가지에서나 달리고 나무가 자라면서 울룩불룩한 잎 가시는 차츰 퇴화되어 잎 끝의 가시 하나만 남는다. 무슨 이유로 가시 달린 잎을 만들었을까?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초식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튼튼한 입과 이빨을 가졌더라도 호랑이의 가시를 먹어치울 수 있는 불가사리는 없기 때문이다.
호랑가시나무는 늘 푸른 작은 나무로 제주도와 전남북 서쪽 해안지대에 드물게 자란다. 암수 딴 나무이며 늦봄 잎겨드랑이에 5∼6개의 하얀 꽃이 달린다. 굵은 콩알 크기의 동그란 열매가 가을이면 빨갛게 익어 다음해 봄까지도 가지에 달려 있다. 정원수나 분재로 심기도하나 가시 같지 않은 잎 가시에 몇 번 당하고 나면 홧김에 나무 통째로 잘라버린다.
영어이름은 'holly'이며 우리 것보다 훨씬 얌전하게 생긴 여러 종류의 서양호랑가시나무가 있다. 우리와는 달리 서양인들의 호랑가시나무 사랑은 각별하다. 십자가를 멘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갈 때,‘로빈’이라는 작은 새가 예수의 머리에 박힌 가시를 빼려고 온 힘을 다하여 쪼았다고 전하는데, 이 새가 좋아하는 먹이가 바로 호랑가시나무 열매라고 한다. 그래서 고전적인 크리스마스 카드엔 실버 벨과 함께 어김없이 이 나무의 잎이 그려져 있다.
나라마다 호랑가시나무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유럽인들은 악마들이 이 나무를 무서워하여 집 주변이나 마구간에 걸어두면 사람이나 가축모두 건강하게 지낼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영국에서는 이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다니면 행운을 가져와서 위험한 일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독일인들은 면류관을 짜는 데 이 나무를 썼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는 입춘 때를 비롯하여 해가 바뀔 때나 유행병이 심한 때는 정어리의 머리를 이 나무에 끼워 문에 달고 마귀를 쫓아내는 풍습이 있다한다. 중국인들은 주술적인 의미가 아니라 약제로 이용하였다. 껍질과 잎이 달린 가지로 즙을 만들어 마시며 강장제로서 특히 콩팥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호랑가시나무 외에 감탕나무, 먼나무, 꽝꽝나무, 대팻집나무, 일본에서 가져온 낙상홍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들어온 여러 원예품종들은 모두 호랑가시나무와 가까운 형제나무이다. 대부분 아름다운 붉은 열매를 자랑하는 상록수이며 남부지방에서만 자랄 수 있으나 대팻집나무만은 낙엽수이고 중부지방까지 올라온다. <경북대 임산공학과 sjpark@knu.ac.kr>
회양목
회양목은 경북북부, 충북, 강원도, 황해도에 걸치는 석회암지대에 주로 자란다.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회양목이란 이름이 생긴 것 같다. 옛 이름은 황양목(黃楊木)이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회양목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손톱크기 남짓하면서 도톰한 잎사귀가 사시사철 달리는 자그마한 나무이다. 대체로 사람 키 남짓한 크기가 고작이나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면 키가 4∼5미터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생명력이 왕성하여 사람들이 기분 나는 대로 이리저리 잘라대어도 금새 가지를 뻗어낸다. 기본형인 둥근 모양에서 날라 가는 새 모양까지 그야말로 '엿장수 마음대로' 다듬어도 한마디 불평이 없다. 그래서 널따란 잔디밭의 가장자리나 고급주택의 오솔길을 보기 좋게 장식하는 나무로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옛 쓰임새는 이런 조경수가 아니라 연약해 보이는 자그마한 줄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태종10년(1410) 점을 치는 도구로 황양목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내용을 비롯하여, 13년(1413)에는 의정부에서 호패법을 의논하여 4품 이상에는 전부터 사용하던 녹각 대신에 황양목으로 바꾸어 쓰도록 하였고, 세종25년(1443)에는 동궁을 출입하는 표신(標信)을 황양목으로 만들게 하였다.
이후 조선조 중후기에 들어와서는 고급 목판활자의 재료로 많이 쓰이면서 수요가 급증한 것으로 보인다. 선조36년(1603) 춘추관에서 실록판각에 쓸 주자가 부식되어 새겨서 보충하려는데 황양목이 매우 부족하다 하였고, 정조20년(1796)에는 정리주자(整理鑄字)을 완성하고 임금에게 보고하는 내용 중에, '임자년에 황양목을 사용하여 크고 작은 글자 32만여 자를 새기어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회양목은 이 외에도 도장을 새기는 도장나무로도 유명하다. 관인이나 옛 선비들의 낙관도 대부분 이 나무이다. 또 머리 빗, 장기 알 등으로도 널리 쓰였다.
오늘날 정원수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정도의 작은 나무가 삼국사기나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오를 만큼 귀중하게 쓴 이유는 무엇인가? 회양목은 다른 어떤 나무도 갖고 있지 않은 독특한 세포구조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물을 운반하는 물관세포가 크고, 나무를 지탱해주는 섬유세포는 작다. 그러나 회양목은 물관과 섬유의 지름이 거의 같은 유일한 나무이다. 물관의 지름이 0.02mm 정도로 0.1∼0.3mm나 되는 다른 나무보다 훨씬 작고, 나이테 전체에 걸쳐 고루 고루 분포하므로 나무질이 곱고 균일하며 치밀하고 단단하기까지 하다. 구하기 쉽고 가공하기 쉬우면서 마치 상아나 옥에다 글자를 새겨 둔 것과 다름이 없는 뛰어난 재료이다.
또 황양목이란 옛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노르스름한 나무 색이 고급재료로서의 품격에 어울린다. 그러나 회양목은 크게 자라지도 않고 또 자람의 속도도 너무 늦어 큰 목판이나 많은 양이 필요할 때마다 모두 쓸 수 없다. 이럴 때는 벚나무나 배나무를 회양목 대신 쓴다.
회화나무
당나라 때 안녹산의 난으로 궁궐이 점령 당하여 옥에 갇힌 왕유는 응벽지(凝碧池)라는 시에 "회화나무 낙엽 지는 궁궐은 쓸쓸한데 /응벽지 언덕에는 주악 소리만 들려오누나"라고 읊조렸다. 중국의 궁궐에 널리 심는 나무임을 짐작할 수 있고, 우리나라의 왕궁에도 창덕궁의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상서로운 나무의 하나로 매우 귀히 여겼다. 주나라 때 조정에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되는 삼공(三公)을 상징할 정도로 귀한 나무로 여겼기 때문이다. 과거에 급제하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관리가 벼슬을 얻어 출세한 후 관직에서 퇴직할 때면 기념으로 심는 것도 회화나무였다고 한다.
회화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 그 꽃을 괴화(槐花)라고 하는데 괴(槐)의 중국 발음이 '회'이므로 회화나무 혹은 회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느티나무도 흔히 괴목이라하여 옛 문헌에서는 앞뒤 관계로 판단하는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이름은 학자수(學者樹)이고 영어로도 같은 의미로 scholar tree라고 쓴다. 나무의 가지 뻗은 모양이 멋대로 자라 학자의 기개를 상징한다는 풀이도 있다.
회화나무는 약간의 논란이 있으나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시기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해론(奚論)이 "백제의 침공으로 성이 함락되자 회화나무에 머리를 부딪쳐 죽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삼국시대 이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은행나무나 느티나무와 함께 전설이나 유래가 전해져 오는 회화나무 노거수(老巨樹)를 전국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충남 서산 해미면 읍내리의 해미읍성(사적 제116호)내에 자라는 약 600년 된 회화나무는 조선 말기 병인사옥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죽였으므로 교수목(絞首木) 또는 호야나무 등으로 불려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그밖에 고궁이나 서원, 문묘, 벼슬하던 양반 동네에는 어김없이 회화나무가 심겨져 있다.
흔히 말하는 남가일몽(南柯一夢)도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꿈속에 괴안국(槐安國) 태수가 되어 호강을 누리다 어느 날 꿈을 깨어보니, 바로 자기 집 뜰의 회화나무 밑둥 아래의 개미나라를 갔다 온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전국 어디에나 자라는 낙엽 활엽수로 지름이 두세 아름, 키가 수십m에 이르는 큰 나무이다.
어린가지는 잎 색깔과 같은 녹색이 특징이며 나이를 먹으면 나무 껍질은 세로로 깊게 갈라진다. 잎은 아카시아와 아주 비슷하게 생겼으나 끝이 점점 좁아져서 뾰족해진다. 꽃은 가지의 끝에 여러 개의 원뿔모양 꽃대에 복합하여 달리며 늦여름에 연한 노랑꽃이 핀다.
본초강목에는 회화나무 종자, 가지, 속껍질, 진은 치질이나 불에 덴 데 쓰인다 하였고, 특히 꽃은 말려서 고혈압, 지혈, 혈변, 대하증 등에 널리 이용 되었다. 꽃에 들어있는 루틴(rutin.일명 비타민P)이라는 물질은 모세혈관을 강화하는 작용이 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도 하였다. 솥에 꽃을 달여 나오는 루틴의 노란 색소로 물을 들인 한지에 부적을 쓰면 효험이 더 있다고 알려져 있다. 열매는 염주를 길게 꿰어 놓은 모양이고 종자가 들어 있는 부분이 잘록잘록하여 매우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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